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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 톡톡] 임마누엘 칸트는 미학의 발전에 혁혁한 공헌을 했다. 바움가르텐에 의해 정초된 근대 미학은 칸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학적 체계를 잡아간다.
흔히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 불리우는 칸트의 혁명적 인식론은 미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거칠게 설명하자면 칸트는 대상에 대한 인식주체의 피동적 수용이라는 기존의 인식이론을 단호히 거부했다.
대신 오성의 열두 범주를 통해 감각자료를 능동적으로 재구성하는 능력에 주목했다. 이를 통해 이성의 한계를 정확히 근거지우고 인간이성의 독단과 오류를 고치려 했다. 외부세계를 현상계와 예지계로 나누고 인식의 그물망은 현상계만 포착할 수 있으며 물자체(DING AN SICH)의 세계인 예지계는 직접 알 수 없다고 한 것도 그런 이유다.
칸트는 미를 ‘아름다움(Schoenheit)’과 ‘숭고미(Erhabenheit)’로 나눈다. 전통적으로 숭고미는 예술작품을 통해 영혼이 고양되는 카타르시스적 체험을 말한다.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듣거나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볼때 느끼는 정신적 엑스터시나 몰아(沒我)의 경지가 그런 것이다. 근대에 이르면 숭고미의 개념은 복잡하게 분화되는데 칸트가 이를 체계화시킨다.
그는 특히 대자연의 압도적 위력이 불러일으키는 전율과 공포감을 숭고미와 연결시켰다. 이를테면 별이 꽉 차서 빛나는 밤하늘이나 거대한 폭풍우가 만들어낸 집채만한 파도 앞에서 느끼는 감정은 일종의 미적 체험이다. 오감의 한계,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는 이런 감정은 예술작품이 선사하는 미적 쾌감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칸트는 숭고미를 수학적 숭고미와 역학적 숭고미로 구분한다. 전자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게 함으로써 인식의 외연을 확장시킨다면 후자는 유약한 자아를 성찰하게 함으로써 실천 이성을 고양시킨다.
가끔, 허블망원경이 찍은 사진을 보다보면 칸트의 숭고미가 이런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윗 사진은 머리털 자리에 있는 정면 나선은하 NGC 4921이다. 지구로부터 3억2000만 광년 떨어져있다. 은하의 장대한 모습도 그렇거니와 그 주변의 새털처럼 많은 자잘한 은하들을 보라. 막대은하, 소용돌이 은하, 불규칙 은하들이 해변가의 모래알처럼 그득하다.
은하 하나하나가 수천억개의 항성을 갖고 있고 또 각각의 항성은 지구같은 행성을 갖고 있으니 도대체 이 사진에만 별들이 얼마나 많은 걸까. 그 광대무변함에 문득 두려움이 앞선다. 그 광막함에 머리털이 쭈뼛 선다. 칸트도 밤하늘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을까.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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