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주 미완성 유작‘별이 차가운…’, 독자 상상으로 장식될 대미

이병주 미완성 유작‘별이 차가운…’, 독자 상상으로 장식될 대미

기사승인 2009-04-10 17:29:01


[쿠키 문화] 소설이 어떻게 끝나는지 영원히 알 수 없는 작품이 있다. 작가가 소설을 쓰는 도중에 작고한 경우가 그것인데 학병세대 문학의 대표 작가 이병주(1921∼1992·사진)의 ‘별이 차가운 밤이면’(문학의숲)도 이에 해당한다. 1989년부터 1992년까지 계간 ‘민족과 문학’에 연재 도중 작가가 세상을 뜨는 바람에 미완성 유작이 되고 말았지만 이 소설은 “완성되었다면 ‘지리산’과 같은 위치에 섰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 수작이다.

소설 ‘관부연락선’ ‘지리산’과 함께 이병주 문학 3부작으로 꼽히는 유작은 일본 와세다대 재학 중 학병에 동원돼 중국 쑤저우 60사단에 졸병으로 배치됐던 작가의 체험이 생생하게 녹아 있다. 소설은 노비 출신인 박달세가 우여곡절 끝에 도일(渡日), 오사카고등학교와 동경제대를 졸업하고 입신 양명의 길을 택해 극렬한 일본인 장교 엔도오 대위로 변신하는 과정을 통해 학병 세대의 계층 문제를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다. 소설도 소설이지만 이 소설의 탄생 배경을 쪽집게처럼 짚어내고 있는 김윤식 교수의 예리한 해설은 돋보인다. “쑤저우 60사단 졸병인 이병주가 보초를 서는 마당에 ‘쑤저우(蘇州) 야곡’을 가만히 입으로 외우곤 했으리라 함은 짐작이 되고도 남습니다.”

일본 본토를 뒤흔든 세기적 여배우이자 가수 이향란이 부른 ‘쑤저우 야곡’은 당시 중국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곡이 되었고 이병주 역시
“그대 가슴에 안겨 듣는 것은/꿈의 뱃노래 새들의 노래/맑은 쑤저우 꽃이 지는 봄을/아쉬워하는지 버드나무가 흐느껴 우네”로 시작하는 이 노래를 읊조리며 학병 세대의 한을 다스렸을 것이라는 짐작이다. 만주 무순에서 일본인을 부모로 태어난 이향란은 봉천 방송국 가수로, 만주영화사 배우로 활동하면서 중국인 행세를 했다. 일본인이 중국인으로 변신한 것인데 김 교수는 바로 이 대목이 ‘별이 차가운 밤이면’의 주인공 박달세가 한국인으로써 일본인 행세를 하는 설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향란의 회고기 ‘이향란, 나의 반생’이 일본 신조사에서 출간된 것은 1986년이다. 이병주는 어떤 경로로든 이 책을 입수해 읽었을 것이고 그 독후감이 마음을 움직여 1989년 창간된 계간 ‘민족과 문학’1호부터 소설을 연재했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이 책을 읽자 상해를 통해 귀국한 노예이자 용병 이병주는 형용하기 어려운 감동에 휩싸였을 겁니다. 아무리 용병이라도 청춘은 있는 법이니까.”

한마디로 작가 이병주의 독서 편력 혹은 교양의 수준이 낳은 소설이 ‘별이 차가운 밤이면’이라는 것인데 ‘노비 박발세=엔도오 대위’라는 도식은 이병주가 읽은 ‘이향란, 나의 반생’이란 책에서 연유한다는 결론이다. 김 교수는 “일제강점기 학병 체험과 광복 전후 정세에 대한 기록적 가치가 높은 작품”이라며 “비록 자괴감에 찬 주인공이 앞으로의 처신을 고민하는 대목에서 중단되긴 했지만 후반부가 마무리됐다면 박달세가 막판에 민족을 택해 대한민국임시정부 편으로 돌아섰을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둘 때 작가가 마무리 짓지 못한 소설의 대미는 독자들의 상상으로 메워질 수 있을 것이다.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단어만 즐비하게 나열되는 요즘 소설에서 느낄 수 없는 강하고 힘있고 굵은 이야기를 읽는 맛에 봄밤은 짧기만 하다. 이병주기념사업회와 한국문학평론가협회는 11일 경남 하동 이병주문학관에서 이병주문학을 재조명하는 강연회를 연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정철훈 기자
chjung@kmib.co.kr

▶뭔데 그래◀조혜련 '기미가요' 박수…무개념인가, 무지인가

정철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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