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회에 대해 모 미술평론가가 쓴 서문이다. 비평 대상이 중견 작가의 추상조각품인 점을 감안하더라도 지나치게 거창하고 현학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작품을 설명하는 데 ‘태초’까지 동원한 이 평론가는 “근작의 빛은 존재의 내면의 빛이 눈부신 빛살의 울림으로서 바깥의 경계에까지 흘러나온 절정(絶頂)이자 결정(決定)의 자태를 드러낸다”고 해당 작가의 작품세계를 극찬했다.
기자에게는 매주 수십 건의 전시회 관련 팸플릿과 도록들이 전달된다. 그런데 여기에 실린 평론들은 온갖 난해한 철학적 개념어들을 끌어다 붙여 작품을 극도로 미화하고 칭송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문학계에서 ‘주례사 비평’이 간혹 도마 위에 오르곤 하는데, 미술계는 그 정도가 훨씬 심한 것으로 보인다. 작가가 무명이든 새파란 신진이든, 평론만 보면 모두 세계와 우주를 통찰하는 궁극의 사상가에 다름 아니다. 가령 이렇다.
“○○○이 탐미하는 작품세계를 견인하는 주요 개념은 레비나스가 말하는 ‘존재성’과 ‘타자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레비나스의 존재성은….” “감상적인 관찰안(觀察眼)에 의한 기록, 사색성(思索性)은 마치 스위스의 철학자 앙리 프레데릭 아미엘(Henri-Frederic Amiel )의 일기(Fragments d'un Journal intime)에서 느껴지는 여백과 닮았음을 인지하는 것도 그다지 난해한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작가에 대한 이 정도의 형이상학적 포장은 약과에 속한다. 서구 이론을 우리 어법에 맞게 소화하거나 체화하려는 노력도 거의 안 보인다. 결국 미술계에 만연한 ‘심오한 칭찬’ 일색의 비평 문화는 오히려 작가와 작품, 관람자를 서로 유리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 십상이다. 평론가는 작품과 수용자를 이어주는 교량 역할을 하는 존재라는 기본명제를 다시금 환기해야할 때가 아닐까. 평론이 소수 전문가들끼리만 향유하는 고상한 덕담의 세계로 국한돼서는 안될 것이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호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