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감을 느낀다.” 서른, 마흔, 쉰을 목전에 둔 이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다. 서른은 자기 인생을, 마흔은 가족을, 쉰은 노후를 책임진다. 비록 세대마다 ‘나이 듦’에 대한 고민의 껍질은 다를지라도 속은 늘 ‘책임감’으로 꽉 차 있다.
“이제는”과 “그때는”으로 시작하곤 하는 연말연시 수다도 결국 ‘책임감’과 궤를 같이한다. 한 살이라도 젊었던 ‘그때는’ 변화에 대한 의지와 선택의 폭이 넓었지만 ‘이제는’ 그러기엔 책임져야 할 것도 많고 늦은 감이 있다고. 이렇게 보면 삶은 항상 돌이킬 수 없는 막다른 길로 달려가는 것이다.
이제 곧 청춘을 끝낼 29세(82년생), 중년에 접어들 39세(72년생), 장년에 진입할 49세(62년생). 이맘때쯤 나이 얘기를 한창 하고 있을 이들에게 물었다. “당신의 12월은 어떻습니까?”
29: 젊긴 한데 어리진 않구나
“‘최종 선택’을 앞둔 긴장감이라고 할까요? 20대는 아니다 싶으면 다른 길을 갈 여지가 많지만 30대로 올라서는 순간 직장도 그렇고 현재 위치에 남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들어요. 연애도 그래요. 지금 연습하는 기분으로 여자를 만날 순 없잖아요. 최종 선택할 여자란 걸 염두에 둬야 하니까. 예전처럼 순수한 연애는 못할 것 같아요. 결혼 조건이 맞는 여자를 만나야겠죠.”
올해 대기업 정규직이 된 김모씨는 요즘 이런 고민을 한다. 이건 혼기를 넘긴 30대 후반이 아니라 29세 총각의 얘기다. 가수 김광석은 ‘서른 즈음에’에서 청춘과의 이별을 노래했지만 요즘 서른은 다르다. 어리지 않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해 영리하다.
‘IMF 세대(대학 졸업 전후에 외환위기를 겪은 1990년대 학번)’의 거친 삶을 뒤에서 지켜본 29세 ‘01학번’들은 오히려 너무 일찍 철이 들었다. 대학 시절 취업용 스펙을 쌓으며 시간을 보냈고, 졸업하자마자 ‘88만원 세대’와 ‘정규직’으로 나뉘었다. 방황 한번 잘못하면 정규직이 88만원 세대로 전락한다.
말에선 벌써 ‘노티’가 묻어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29세가 대부분이다. 휴학생, 취업준비생으로 대학에서 몇 년 묵었다 사회에 진출하다 보니 경제적 독립이나 결혼은 아직 요원하다. 예전 같으면 ‘노처녀’ 딱지가 붙었겠지만 지금은 30대 중반은 넘어야 ‘노(老)’자가 붙는다.
“나이랑 상관없이 좋은 사람 생기면 (결혼)하자는 주의거든요. 어른들은 이 나이면 결혼하겠거니
생각해서 ‘언제 신랑감 데려오니?’ 묻는데, 이럴 땐 ‘인식의 갭(차이)’을 느껴요. 전 오히려 결혼에 대한 부담이 없는 게 고민이에요.”(회사원 정모씨·여)
이른 감은 있지만 여성은 이 나이부터 노화 고민을 시작한다. 얼굴에 실제로 주름이 생겨서가 아니라, 한 살 나이 든다는 게 연애 또는 결혼 시장에선 경쟁력이 약해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한의사 최모(여)씨는 요즘 거울을 보며 한숨짓는 날이 많다. “쌩얼(민얼굴)은 (남에게) 미안하죠. 내년이면 피부가 확 달라지지 않겠어요? 스무 살 여대생들이 파릇파릇하게 꾸미고 다니는 게 부러워요. 같이 꾸며도 표정이 달라요.”
어쩌면 대학 시절 취업에 저당 잡힌 지금의 29세는 애초부터 청춘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들은 어쨌든 30대란 책임감에 요즘 마음이 무겁다.
39: 이제 내가 젊지 않구나.
“어느 순간 둘러보니 사람들이 달리는 트랙에서 나만 저만치 벗어나 있는 거예요. 낯선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요, 그렇다고 그 트랙으로 가진 않을 거고, 이제 마흔인데 저만의 다른 길을 찾겠죠.”
대학 시간강사 정모(39·여)씨는 미스(Miss)다. 비정규직이어서 스스로 ‘골드 미스’가 아니라 ‘골드 없는 미스’라고 말한다.
“결혼은 포기한 단계에 가깝고 오히려 노후를 혼자 준비해야 한다는 부담이 많아요. 보험, 연금을 뭘 들어야 노후를 대비할 수 있을까. 20대에서 30대로 올라갈 땐 이렇게 불안하진 않았는데 지금은 그거랑 차원이 달라요. 50대로 넘어갈 땐 더 불안하겠죠?” 독신 번역가 김영숙(여·가명)씨도 40세를 앞두고 고단한 건 마찬가지다.
대학 졸업 후 서로 다른 길에 진입한 사람들은 39세쯤 서로 다른 도로의 한복판에 서 있다. 기혼이냐, 미혼이냐/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 집 장만을 했느냐, 못했느냐/ 집 외에 재테크 통장이 있느냐, 없느냐. 이 네 가지 기준만 들이대도 벌써 수많은 계층으로 39세가 나뉜다.
‘소유하지 못한 것’에 대한 상실감만이 아니다. 이젠 미루고 싶어도 더는 거부할 수 없는 ‘중년’이란 수식어까지 39세를 압박한다. 그래서 29세의 푸념과 방황에 ‘겉멋’이 살짝 껴 있다면 39세의 방황은 한층 실제적이고, 구체적이며, 불가항력적이다.
40세를 앞둔 주부들은 이때쯤 가정이 아닌 사회를 기웃거린다. 자녀도 엄마 손을 탈 나이는 지났기에 내 일을 찾고 싶다. 만화영화를 보러 아이 손을 잡고 외출하던 주부가 이제는 뮤지컬 ‘시카고’를 보고 분위기 좋은 데서 커피도 마시고 싶다.
“백화점이 아니라 아웃렛에 가도 애들 옷, 남편 옷은 사는데 내 옷은 쉽게 못 사요. 화장도 안 하고, 거울을 봐도 초췌하고. 이젠 내 이름 걸고 일을 하고 싶어요. 지나간 세월을 보상받고 싶은 거죠.”
이렇게 말하는 7년차 주부 김모(39)씨는 여전히 지갑을 여는 게 쉽지 않다. 애들이 크는 건 앞으로 비용이 점점 많아진다는 거고, 그만큼 노후 보장도 걱정이다.
40대 남성은 직장에서 관리자로 진급한다. 후배에게 만만해 보여도 안 되고 상사 눈치도 살펴야 하는 ‘허리 역할’은 그래서 더 피곤하다.
“도전, 젊음과는 멀어지고 직업, 가족 이런 단어 속으로 들어가는 불안한 느낌. 그렇지만 아직 어른 될 준비는 돼 있지 않은 거죠. 40세가 돼도 인생은 살 만한 걸까? 그래서 나이 든 어른들께 여쭤봤어요. ‘40대는 가장 바쁘고 많은 일을 한다. 몸도 여전히 쓸 만하고 추하지 않다.’ 그 말을 들으니 무척 위로가 되더군요.”
회사원 김준수(41·가명)씨의 말이다. 차장급인 그는 40세를 불과 두 달 앞두고 안정감을 찾기 위해 하프 마라톤에 도전했었다고 한다. 실제 40대에 진입한 느낌? 김씨는 “나쁘지 않다”고 말한다.
49: 인생은 두 가지다. 지루하거나, 힘들거나
49세는 외롭다. 남성이면 더 외롭다. 동창회에 나가도 대화를 주도하는 이는 ‘승리자’이거나 ‘성격 좋은 사람’이다. 자녀 교육, 재테크, 승진에 성공해야 할 말이 많다. 그렇지 않은데도 ‘허허’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진짜 성격이 좋은 거다. 위너도 아니고, 성격도 좋지 않으면서 동창회에서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소재는 옛날 얘기뿐이다. “저 녀석, 학교 다닐 때 그랬잖아”류의.
왠지 모를 ‘지루함’도 49세 남성을 괴롭힌다. “애는 고3이라 밤 12시에 집에 오고, ‘내가 과연 언제 웃었나’ 생각해 보니 별로 없어. 오늘보다 내일이 나을 거란 열정과 동력이 없어요. 육체적으로도 쇠퇴해 가고. 남들보다 딱히 못 산 것도 아닌데 자신감은 없어요. 누가 그러더라고요. 인생은 두 가지다. (돈이 있으면) 지루하거나, (돈이 없으면) 힘들거나.”
이렇게 말하는 임모(49·중고차 매매업)씨는 노후 준비는 어느 정도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도 자녀에게 얼마나 돈을 쥐어줄 수 있을지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대기업 부장 오모(49)씨는 최근 임원 승진이 좌절되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 아내는 회사에 계속 남아 있으라 하는데, 아내 말대로 하고 싶진 않고, 그렇다고 속 시원하게 가족에게 고민을 털어놓지도 못한다.
창원에 사는 주부 박모(50)씨는 지난해 겨울을 이렇게 회상했다. “아, 이 겨울이 싫다. 이대로 할머니가 되긴 싫다.” 박씨는 지난해 폐경도 겪었다. 이제 여자로서의 인생도 끝나는 건가. 자녀들은 미국, 서울로 유학을 떠나 부부만 남았다.
“젊을 땐 일찍 오라고 바가지 긁었는데 지금은 남편이 일찍 오는 것도 싫어요. 남편이 나이 드니까 여자처럼 돼서 잔소리가 많거든. 저녁부터 잠들기까지 집이 적막강산이야. 남편이랑 서로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해요. ‘우리 참 재미없다, 앞으로 애들도 없고 어떻게 살아가지?’”
숫자 ‘9’를 단 이들은 서른, 마흔, 쉰을 코앞에 두고 저마다의 막막함을 토로한다. 누구도 정답을 제시할 순 없다. 기억할 한 가지. 예순이 되면 ‘내가 쉰살만 됐어도…’라고 말하리란 사실. 인간은 늘 같은 고민을 하고, 또 그 고민을 망각한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박유리 기자 nopimula@kmib.co.kr
“이제는”과 “그때는”으로 시작하곤 하는 연말연시 수다도 결국 ‘책임감’과 궤를 같이한다. 한 살이라도 젊었던 ‘그때는’ 변화에 대한 의지와 선택의 폭이 넓었지만 ‘이제는’ 그러기엔 책임져야 할 것도 많고 늦은 감이 있다고. 이렇게 보면 삶은 항상 돌이킬 수 없는 막다른 길로 달려가는 것이다.
이제 곧 청춘을 끝낼 29세(82년생), 중년에 접어들 39세(72년생), 장년에 진입할 49세(62년생). 이맘때쯤 나이 얘기를 한창 하고 있을 이들에게 물었다. “당신의 12월은 어떻습니까?”
29: 젊긴 한데 어리진 않구나
“‘최종 선택’을 앞둔 긴장감이라고 할까요? 20대는 아니다 싶으면 다른 길을 갈 여지가 많지만 30대로 올라서는 순간 직장도 그렇고 현재 위치에 남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들어요. 연애도 그래요. 지금 연습하는 기분으로 여자를 만날 순 없잖아요. 최종 선택할 여자란 걸 염두에 둬야 하니까. 예전처럼 순수한 연애는 못할 것 같아요. 결혼 조건이 맞는 여자를 만나야겠죠.”
올해 대기업 정규직이 된 김모씨는 요즘 이런 고민을 한다. 이건 혼기를 넘긴 30대 후반이 아니라 29세 총각의 얘기다. 가수 김광석은 ‘서른 즈음에’에서 청춘과의 이별을 노래했지만 요즘 서른은 다르다. 어리지 않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해 영리하다.
‘IMF 세대(대학 졸업 전후에 외환위기를 겪은 1990년대 학번)’의 거친 삶을 뒤에서 지켜본 29세 ‘01학번’들은 오히려 너무 일찍 철이 들었다. 대학 시절 취업용 스펙을 쌓으며 시간을 보냈고, 졸업하자마자 ‘88만원 세대’와 ‘정규직’으로 나뉘었다. 방황 한번 잘못하면 정규직이 88만원 세대로 전락한다.
말에선 벌써 ‘노티’가 묻어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29세가 대부분이다. 휴학생, 취업준비생으로 대학에서 몇 년 묵었다 사회에 진출하다 보니 경제적 독립이나 결혼은 아직 요원하다. 예전 같으면 ‘노처녀’ 딱지가 붙었겠지만 지금은 30대 중반은 넘어야 ‘노(老)’자가 붙는다.
“나이랑 상관없이 좋은 사람 생기면 (결혼)하자는 주의거든요. 어른들은 이 나이면 결혼하겠거니
생각해서 ‘언제 신랑감 데려오니?’ 묻는데, 이럴 땐 ‘인식의 갭(차이)’을 느껴요. 전 오히려 결혼에 대한 부담이 없는 게 고민이에요.”(회사원 정모씨·여)
이른 감은 있지만 여성은 이 나이부터 노화 고민을 시작한다. 얼굴에 실제로 주름이 생겨서가 아니라, 한 살 나이 든다는 게 연애 또는 결혼 시장에선 경쟁력이 약해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한의사 최모(여)씨는 요즘 거울을 보며 한숨짓는 날이 많다. “쌩얼(민얼굴)은 (남에게) 미안하죠. 내년이면 피부가 확 달라지지 않겠어요? 스무 살 여대생들이 파릇파릇하게 꾸미고 다니는 게 부러워요. 같이 꾸며도 표정이 달라요.”
어쩌면 대학 시절 취업에 저당 잡힌 지금의 29세는 애초부터 청춘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들은 어쨌든 30대란 책임감에 요즘 마음이 무겁다.
39: 이제 내가 젊지 않구나.
“어느 순간 둘러보니 사람들이 달리는 트랙에서 나만 저만치 벗어나 있는 거예요. 낯선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요, 그렇다고 그 트랙으로 가진 않을 거고, 이제 마흔인데 저만의 다른 길을 찾겠죠.”
대학 시간강사 정모(39·여)씨는 미스(Miss)다. 비정규직이어서 스스로 ‘골드 미스’가 아니라 ‘골드 없는 미스’라고 말한다.
“결혼은 포기한 단계에 가깝고 오히려 노후를 혼자 준비해야 한다는 부담이 많아요. 보험, 연금을 뭘 들어야 노후를 대비할 수 있을까. 20대에서 30대로 올라갈 땐 이렇게 불안하진 않았는데 지금은 그거랑 차원이 달라요. 50대로 넘어갈 땐 더 불안하겠죠?” 독신 번역가 김영숙(여·가명)씨도 40세를 앞두고 고단한 건 마찬가지다.
대학 졸업 후 서로 다른 길에 진입한 사람들은 39세쯤 서로 다른 도로의 한복판에 서 있다. 기혼이냐, 미혼이냐/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 집 장만을 했느냐, 못했느냐/ 집 외에 재테크 통장이 있느냐, 없느냐. 이 네 가지 기준만 들이대도 벌써 수많은 계층으로 39세가 나뉜다.
‘소유하지 못한 것’에 대한 상실감만이 아니다. 이젠 미루고 싶어도 더는 거부할 수 없는 ‘중년’이란 수식어까지 39세를 압박한다. 그래서 29세의 푸념과 방황에 ‘겉멋’이 살짝 껴 있다면 39세의 방황은 한층 실제적이고, 구체적이며, 불가항력적이다.
40세를 앞둔 주부들은 이때쯤 가정이 아닌 사회를 기웃거린다. 자녀도 엄마 손을 탈 나이는 지났기에 내 일을 찾고 싶다. 만화영화를 보러 아이 손을 잡고 외출하던 주부가 이제는 뮤지컬 ‘시카고’를 보고 분위기 좋은 데서 커피도 마시고 싶다.
“백화점이 아니라 아웃렛에 가도 애들 옷, 남편 옷은 사는데 내 옷은 쉽게 못 사요. 화장도 안 하고, 거울을 봐도 초췌하고. 이젠 내 이름 걸고 일을 하고 싶어요. 지나간 세월을 보상받고 싶은 거죠.”
이렇게 말하는 7년차 주부 김모(39)씨는 여전히 지갑을 여는 게 쉽지 않다. 애들이 크는 건 앞으로 비용이 점점 많아진다는 거고, 그만큼 노후 보장도 걱정이다.
40대 남성은 직장에서 관리자로 진급한다. 후배에게 만만해 보여도 안 되고 상사 눈치도 살펴야 하는 ‘허리 역할’은 그래서 더 피곤하다.
“도전, 젊음과는 멀어지고 직업, 가족 이런 단어 속으로 들어가는 불안한 느낌. 그렇지만 아직 어른 될 준비는 돼 있지 않은 거죠. 40세가 돼도 인생은 살 만한 걸까? 그래서 나이 든 어른들께 여쭤봤어요. ‘40대는 가장 바쁘고 많은 일을 한다. 몸도 여전히 쓸 만하고 추하지 않다.’ 그 말을 들으니 무척 위로가 되더군요.”
회사원 김준수(41·가명)씨의 말이다. 차장급인 그는 40세를 불과 두 달 앞두고 안정감을 찾기 위해 하프 마라톤에 도전했었다고 한다. 실제 40대에 진입한 느낌? 김씨는 “나쁘지 않다”고 말한다.
49: 인생은 두 가지다. 지루하거나, 힘들거나
49세는 외롭다. 남성이면 더 외롭다. 동창회에 나가도 대화를 주도하는 이는 ‘승리자’이거나 ‘성격 좋은 사람’이다. 자녀 교육, 재테크, 승진에 성공해야 할 말이 많다. 그렇지 않은데도 ‘허허’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진짜 성격이 좋은 거다. 위너도 아니고, 성격도 좋지 않으면서 동창회에서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소재는 옛날 얘기뿐이다. “저 녀석, 학교 다닐 때 그랬잖아”류의.
왠지 모를 ‘지루함’도 49세 남성을 괴롭힌다. “애는 고3이라 밤 12시에 집에 오고, ‘내가 과연 언제 웃었나’ 생각해 보니 별로 없어. 오늘보다 내일이 나을 거란 열정과 동력이 없어요. 육체적으로도 쇠퇴해 가고. 남들보다 딱히 못 산 것도 아닌데 자신감은 없어요. 누가 그러더라고요. 인생은 두 가지다. (돈이 있으면) 지루하거나, (돈이 없으면) 힘들거나.”
이렇게 말하는 임모(49·중고차 매매업)씨는 노후 준비는 어느 정도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도 자녀에게 얼마나 돈을 쥐어줄 수 있을지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대기업 부장 오모(49)씨는 최근 임원 승진이 좌절되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 아내는 회사에 계속 남아 있으라 하는데, 아내 말대로 하고 싶진 않고, 그렇다고 속 시원하게 가족에게 고민을 털어놓지도 못한다.
창원에 사는 주부 박모(50)씨는 지난해 겨울을 이렇게 회상했다. “아, 이 겨울이 싫다. 이대로 할머니가 되긴 싫다.” 박씨는 지난해 폐경도 겪었다. 이제 여자로서의 인생도 끝나는 건가. 자녀들은 미국, 서울로 유학을 떠나 부부만 남았다.
“젊을 땐 일찍 오라고 바가지 긁었는데 지금은 남편이 일찍 오는 것도 싫어요. 남편이 나이 드니까 여자처럼 돼서 잔소리가 많거든. 저녁부터 잠들기까지 집이 적막강산이야. 남편이랑 서로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해요. ‘우리 참 재미없다, 앞으로 애들도 없고 어떻게 살아가지?’”
숫자 ‘9’를 단 이들은 서른, 마흔, 쉰을 코앞에 두고 저마다의 막막함을 토로한다. 누구도 정답을 제시할 순 없다. 기억할 한 가지. 예순이 되면 ‘내가 쉰살만 됐어도…’라고 말하리란 사실. 인간은 늘 같은 고민을 하고, 또 그 고민을 망각한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박유리 기자 nopim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