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한양도성, 600년 서울을 품다. 5편

[기획연재] 한양도성, 600년 서울을 품다. 5편

성곽따라 이어진 성곽마을 이야기

 

기사승인 2021-05-30 05:30:08

- 와룡공원에서 혜화문지나 낙산공원까지
- 성곽마을은 함께 가꾸어야 할 미래유산
- 성북동은 한양도성 밖, 문화재 가장 많은 마을
- 신희권 서울시립대 교수와 함께 떠난 순성길
- 10회 연재 통해 도성의 과거와 현재 풀어내
그래픽=이정주 디자이너

성북 마을버스 03번 마이크로버스 차창 너머로
빗물 머금은 봄꽃들과 친근한 풍경이 다가온다.
쌍다리 - 팔각정 - 노인정
가파른 언덕 일방통행길을 오르며
잃어버린 시간 여행을 떠난다.

보슬비 내리는 북정마을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잠시 비를 피했다.
희미한 기억 속 풍경들이 파노라마 되어 지나간다.
돌 틈 사이 피어난 노란 씀바귀
텃밭 사이 아무렇게나 피어난 유채꽃
좁다란 골목길에 심겨진 초롱꽃이 어둑한 돌담길을 밝힌다.
한양도성 낙산 구간 야경

글·사진=곽경근 대기자/ 서울의 성장과 변화를 온몸으로 겪어낸 한양도성은 길이가 18.627㎞로 서울시 5개구를 아우른다. 쿠키뉴스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미래도시 서울을 되짚어보는 ‘한양도성 둘러보기(巡城)’를 10회에 걸쳐 연재(순서는 기사하단) 중이다.

성곽아래 북정마을 전경/
도성과 한 몸을 이룬 듯 형성된 성곽마을은 그 자체로 독특한 역사경관 자원이다. 서울시는 지난 2014년 4월 ‘한양도성 주변 성곽마을 보전관리 종합계획’을 수립하고 총9개 구역에 걸친 22개의 지역을 성곽마을로 지정했다.

5.성곽따라 이어진 성곽마을 이야기
- 사람 향기 묻어나는 북정마을 외
이촌향도(離村向都)의 물결이 거세던 해방 이후부터 성북동 산동네 성벽 아래로 사람들이 하나 둘 정착하며 형성된 복정마을은 시간이 비껴간 듯 지금도 그때의 모습 그대로다. 도시 서민의 생활터전 북정마을은 서울에서 몇 안 남은 산동네 중 하나이다. 마주치는 사람과 어깨가 스칠 것 같은 좁다란 골목길을 걷다보면 복잡한 현대의 삶에서 만날 수 없는 정겨움이 느껴진다. 유채꽃 닮은 노오란 갓 꽃이 제멋대로 핀 마을 텃밭에서 만난 장혜자(76)씨는 “50년 전 시집와서 여태 북정마을에 살고 있다”며 “우리 아이들 키울 때는 대문 활짝 열어놓고 살 정도로 인심 좋은 마을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내일이 초등학교 다니는 증손녀의 생일이다. 푸성귀를 따서 경기도 양주의 외손녀 집에 갈 것”이라며 열심히 손을 놀렸다.
 신희권 서울시립대 교수는 "한양도성 성곽마을은 자연환경과 어우러진 경관적 가치, 건축사적으로 독특한 학술적, 역사적 가치, 문화관광 자원으로서의 가치, 주민과 함께 가꿔온 삶의 터전으로서의 가치 등과 더불어 미래유산으로서의 가치까지 중요도가 크다"고 말한다.

 마을 골목마다 마을사람들의 인심과 여유를 보여주는 것 같은 꽃 화분들이 즐비하다. 담장너머 탐스럽게 핀 5월의 붉은 장미 넝쿨과 함께  골목의 좁은 틈 사이를 비집고 나온 노란 애기똥풀과 씀바귀, 하얀 찔레꽃이 어우러진 파란 지붕 위로 한양도성이 장쾌하게 이어졌다.

한성대입구역에서 오르는 낙산구간 전경. 시대별 축성모습을 살펴 보기 좋은 구간이다. 

조선시대 한양도성을 포함한 주변 지역은 개발이 엄격히 금지된 보호구역이었다. 성벽의 훼손을 막는 것은 물론 주변의 식생과 경관을 보호함으로써 도심의 홍수를 예방하는 효과도 거둘 수 있었다. 흔히 사산금표(四山禁標)라 하는 표석을 세워 한양도성 일대에서는 일체의 경작과 주거, 매장 행위를 금지하였다. 덕분에 한양도성은 조선시대 내내 푸르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고, 때가 되면 도성민들에게 풍류와 여가를 즐기는 놀이터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1969년 낙산아파트 공사 모습/
1969년 1월 착공해 창신동 쪽 낙산지구에 시민아파트 30동을 지었다. 1998년 낙산아파트를 철거하고 낙산공원화사업으로 공원을 조성하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 서울이 근현대 도시로 팽창하는 과정에서 제일 먼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도심은 이미 터를 잡고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 발붙일 틈이 없었고, 그나마 서울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살 수 있었던 곳은 바로 공터로 남아 있던 한양도성 주변 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한양도성의 성벽 안팎으로는 한 가닥 희망을 품고 고향을 떠나 상경한 이주민들의 마을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생성된 토막촌이 오늘날 성곽마을로 변모하였고, 낙산 주변의 이화마을, 장수마을 비롯해 성북동의 북정마을, 장충동 일대, 인왕산 아래 행촌동, 부암동 등 성곽을 따라 수십 개의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낙산 정상에서 성벽을 따라 약간 남쪽으로 내려오면 '좌룡정' 이라고 쓰여 있는 각자성석이 있다. 조선시대 한양의 많은 활터 중 한곳으로, 일제강점기 엽서에 실린 활 쏘는 장면은 바로 이곳에서 찍은 것이다. 이 좌룡정 위 성벽에 오르면, 서울 도심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서울역사박물관소장)

현재도 한양도성은 국가 사적으로 보호하고 있는 탓에 성벽 내외 100미터 이내에서는 대규모 개발이 제한되고 있다. 한때는 이러한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재개발을 요구하던 성곽마을 주민들도 이제는 낙후된 환경을 정비하여 삶의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협조하게 되었는데, 그러한 결과로 탄생한 마을 중 하나가 바로 이화벽화마을이다. 근래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 무대가 되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서울의 명소가 되었다. 하지만 그로 인한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아 적절한 관리 대책이 필요한 시점에 이르렀다.

취재에 동행한 신희권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는 “한양도성은 조선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백년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채 제 모습을 지켜 오고 있다. 전차와 자동차가 도입되고 인구 천만의 대도시로 급성장하는 중에도 서울 시민들은 한양도성을 철거했던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성벽에 기대어 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며 살았다. 어찌 보면 서울 시민에게는 비빌만한 든든한 언덕이었던 셈”이라며 “덕분에 우리는 세계에서도 유례가 드문 수도 성곽을 자랑스런 세계유산에 등재하려고 애쓰고 있고, 이를 고스란히 후손에 물려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종석 별장/
성북동 덕수교회안에 자리한 이 집은 마포에서 새우젓 장사로 부자가 된 이종석의 별장이다. 우물이 있는 바깥마당을 지나 일각문 대문을 들어서면 왼편에 행랑채, 오른편에 본채가 있다.

▷도성 밖 문화재 향기 그윽한 '성북동 돌아보기'
한양도성을 서쪽 울타리로 두고 있는 성북동의 이름은 도성의 북쪽, 도성의 북문 밖에 있는 골짜기에서 연유한다. 조선시대에 도성 사대문 밖에는 마을들이 형성되어 있었으나 성북동 만이 성의 북쪽을 의미하는 지명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산수의 경치가 타 지역에 비해 빼어나 예로부터 도성민들이 이곳을 자주 찾아 심신의 휴식을 취하는 장소로서 손꼽혔기 때문이다.
북정마을에 위치한 성북동 비둘기공원

성북동은 혜화문을 나서 왼쪽에 나타나는 계곡 마을로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수석이 어울려 있으며, 복숭아・앵두나무가 어우러진 풍경이 빼어난 마을이었다. 그리하여 예로부터 사람들은 성북동에 관한 많은 글을 남겼다.
성북동은 한양도성 밖에서 문화재가 가장 많은 지역이다. 서울시는 2013년 성북동을 최초로 ‘역사문화지구’로 지정했다. 우리가 아는 것보다 성북동은 훨씬 매력적이고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갖고 있다. 그래서 성북동을 ‘지붕없는 박물관’이라고도 불린다.
심우장 전경/
만해 한용운의 유택인 심우장은 사적 제550호로 북정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 ‘만해 한용운의 얼이 서려 있는’ 심우장
보슬비가 내리던 늦봄 오후, 심우장에 들어서자 라일락 향이 그윽하다. 맞은편 오래된 아름드리 개회나무가 만개했다. 민족자존의 공간 심우장은 일본 제국주의의 극성기로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이 강하게 이루어지던 1933년, 한용운이 지인들의 도움으로 성북동 깊은 골짜기에 두 칸짜리 집을 지어 기거한 곳이다. 최린, 최남선 등 민족대표들이 변절한 1930년대 한용운은 끝까지 일제와 타협하지 않았다. 성북동 북정마을 좁은 골목길을 따라 올라 동쪽으로 난 대문으로 들어서면 북쪽을 향한 기와집이 있다. 마당에는 만해가 직접 심었다는 향나무가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
심우장은 검소하고 소박한 외형을 보여준다.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온돌방, 오른쪽은 부엌이다. 한용운의 서재였던 온돌방에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자 독립운동가 오세창이 쓴 尋牛莊(심우장)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 이름은 깨우침을 찾아 수행하는 과정을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불교 설화에서 따 온 것이다.

독립운동가 일송 김동삼(1878~1937)이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하자 한용운은 그의 시신을 수습해 심우장에서 5일장을 치러주었다. 일제의 엄중한 감시 속에 치러진 장례식에 조헌영, 조치훈 부자도 참석했다. 만해는 총독부를 등진 이곳 심우장에서 민족지사들과 교류하며 문학활동을 했다. 선사는 이 집에서 나무를 심고 꽃을 가꾸었으나 ‘조선 땅 전체가 감옥’이라며 생전 아궁이에 불은 때지 않았다고 한다.
잠시 심우장 툇마루에 걸터앉아 내리는 처마 끝으로 떨어지는 보슬비에 음율을 맞춰 ‘님의 침묵’을 읊어본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이하 중략)

최순우 옛집/ 처마 밑에서 떨어지는 낙수에 잔잔한 파장이 일고 있다. 최순우 선생이 글과 강연으로 세상에 큰 울림을 전했던 것처럼…

 - ‘박물관장의 안목’ 최순우 옛집
‘두문즉시심산(杜門卽是深山)’, 문을 닫으면 이곳이 바로 깊은 산중이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 최순우 선생이 1976년 성북동 집으로 이사와 사랑방문 위에 걸어 둔 친필편액이다. 신희권 서울시립대 교수는 “최순우 옛집은 1930년대 초 지어진 근대 한옥으로 최순우 선생의 안목이 담긴 집”이라며 “그는 평생을 박물관 학자이자 미술사학자로 살며 우리 문화재를 지키고 한국 미술의 꾸밈없는 아름다움을 탐구하고 글로 세상을 깨웠다.”고 말했다. 아담한 마당에 자연을 들여놓은 듯 무심하게 핀 들꽃과 정갈하게 꾸며진 안채가 새삼 눈길을 끈다.
또한 최순우 옛집이 특별한 이유는 내셔날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시민문화유산 제1호로 한옥의 양옥화 추세로 허물어질 뻔한 것을 시민들이 지켜냈기 때문이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운영하며 전시, 문화강좌, 시민참여 문화예술프로그램을 열고 있다.
선잠단지(사적 제83호)에서 제25회 선잠제가 3년 만에 지난 20일 개최되었다. 선잠제는 누에치기 풍요를 기원하며 왕비가 주체가 돼 양잠의 신인 서릉씨에게 제사를 올리던 국가제례다.

- ‘옷(衣)의 풍요를 빌다’ 선잠단지
선잠단지는 조선 성종(1457~1494) 때 “뽕나무가 잘 크고 살찐 고치로 좋은 실을 얻게 해달라”는 기원을 드리기 위해 혜화문 밖에 세운 제단이다. 나라에서는 일반 백성들에게 누에치기를 장려하기 위하여 왕비가 손수 뽕잎을 따고 누에에게 뽕잎을 먹이는 행사인 ‘친잠례(親蠶禮)’를 열기도 했다.
성북구 성북동에 위치한 선잠단지 전경

 사적 제83호로 지정된 서울 선잠단지(先蠶壇址)는 누에치기를 처음 했다는 중국 고대 황제의 비 서릉씨(西陵氏)를 누에신(잠신 蠶神)으로 모시고 국가의례 선잠제를 지내던 곳이다. 이 단은 고려 성종 2년(983년)에 처음 쌓은 것으로, 단의 앞쪽 끝에 뽕나무를 심고 궁중의 잠실(蠶室)에서 누에를 키우게 하였다.

성북선잠박물관 내부

선잠단의 설치 이후 매년 3월에 제사를 지내다가 1908년 일제가 국가제사를 축소하고 선잠단의 신위를 사직단으로 옮기면서 지금은 그 터만이 남아 있다. 2016년 복원사업을 위한 유적 정밀발굴작업을 통해 선점단 제단의 위치와 유구를 확인했다. 인근 '간송미술관'은 수장고 신축공사와 내부복원공사로 아쉽게 휴관 중이다.

'시인의 방'을 찾은 인근 학교 학생들이 잠시 성북동 시인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시인의 방은 전통 한옥의 처마와 마루를 모티브로 삼아 벽과 바닥을 만들었다. 열린 공간에는 잔디를 깔고 청동주물로 만든 의자들을 들여놨다.

-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방우산장(시인의 방)
성북동은 문학과 관련이 깊은 마을이다. 조선 후기 마을이 생기면서 김정희, 이덕무, 채제공 등이 성북동에 와서 자연을 노래했다. 근대에는 도성 안과 가까우면서 시골의 정취가 남아 있는 성북동에 많은 문인들이 모여들었다. 해방이후에도 성북동에는 문인들이 많이 살았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1920~1968)도 있었다. 그는 성북동에서 32년을 살았다. “마음속에 소를 한 마리 키우면 직접 키우지 않아도 소를 키우는 것과 다름없다”며 자신이 기거했던 모든 집을 방우산장으로 불렀다. 자신의 영혼이 깃든 곳은 모두 자신의 거처라는 뜻이다.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펴낸 ‘청록집’을 비롯해 대표작 대부분이 성북동에서 창작됐다. 그러나 아쉽게도 시인의 집은 1998년 헐렸다. 성북구는 조지훈 기념 건축조형물을 2014년 성북동 초입에 세웠다. 성북동 문학의 감수성을 엿볼 수 있도록 디자인에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시인의 집터 방향으로 문을 내 바깥벽에는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로 시작하는 시인이 가장 아끼던 작품 ‘낙화’가 새겨 넣었다.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 안내센터는 총 5개의 전시실과 카페로 꾸며져 있다. 제1 전시실은 ‘한양도성과 혜화문’, 제2전시실은 시장공관과 한양도성에 관련된 전시실이다. 관람은 무료이다.

- ‘부끄러운 역사를 기억한다’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 안내센터
숙정문을 나와 와룡공원을 거쳐 혜화문으로 흘러내리던 성곽은 경신고와 서울과학고 사이 아스팔트 도로를 만나며 길을 잃는다. 종로구 혜화동과 성북구 성북동의 경계를 이루던 성곽 돌 위로 콘크리트 담장이 쌓이며 제 모습과 기능을 상실했다. 혜화문에서 올라오는 일방통행길을 거슬러 내려가다 보면 경신고등학교 담장, 단독주택 담장, 혜성교회 입구 계단, 두산빌라 담장 아래 부분에 성돌들이 눈에 들어온다.
경신고등학교 담벼락/ 성돌과 일반돌이 혼재되어 있다. 성북동에서 나고 자랐다는 박영준(65)씨는 "어릴적에는 무심히 지나쳤는데 산책할 때 마다 훼손된 성곽이 눈에 들어와 안타깝다"라고 했다.

 한양도성 성곽의 흔적들이다. 아픈 마음으로 성곽이 훼손된 길을 따라 계속 내려가면 높다란 성벽 위에 성곽을 깔고 있는 1940년대 일본식 목조건물을 만난다. 1959년부터 대법원장 공관으로 20년, 1981년부터 33년간 서울시장 공관으로 사용된 건물이다. 일제가 서울 성곽 위에 만든 건물을 서울시장의 공관으로 사용한 부끄러움이지만 이 건물을 보존해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 안내센터로 사용하며 일제의 민족말살정책과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혜화문 전경/
1975년부터 시작되어 1980년에 완공된 서울성곽의 일부로 1992년 복원하였다.

- ‘도성 동북쪽 관문’ 혜화문
동소문(東小門)이라고도 부르는 혜화문은 조선시대에는 여진의 사신이 드나들었고 문을 나서면 수유현(지금의 수유리)을 거쳐 의정부·양주로 도로가 이어진다. 당시 북대문인 숙정문은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혜화문은 양주·포천을 지나 강원도와 함경도로 가는 교통의 시작점이었다.
혜화문 전경/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 8053 , 일제강점기

처음에는 문 이름을 홍화문(弘化門)이라 하였다가 1483년(성종 4) 새로 창건한 창경궁의 동문을 홍화(弘化)라고 정함에 따라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1511년(중종 6) 혜화로 고쳤다.
1684년(숙종 10) 문루(門樓)를 새로 지은 후 한말까지 보존되어 오다가 일제강점기 시기인 1939년 혜화동과 돈암동 사이의 전차길을 내면서 광희문과 함께 헐어버렸다.
인근에 학교가 들어서고 도로가 개설되면서 혜화문과 낙산을 잇는 성곽이  끊겨 있다.

혜화문은 1992년에 원래 위치에서 도로 윗편에 복원하였다. 천장에는 봉황을 그려 넣었다. 조선시대 혜화문 부근은 새로 인한 피해가 상당해서 예방하는 마음으로 봉황을 그려 넣었다 한다. 우리 선조들의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정신을 엿볼 수 있는 그림이다.

낙산공원 아래 이화마을 도로변에 조성된 카페촌/
성곽마을은 철거의 대상이 아니라 한양도성과 함께 지켜나가야 할 미래융합자산으로 주목받고 있다.

- ‘서울의 몽마르트’ 낙산공원과 장수마을, 이화마을
혜화문을 나와 옛 혜화문이 있었을법한 동소문로의 횡단보도를 건너 낙산을 오른다. 낙산은 원래 낙타를 닮았다고 해서 얻은 이름으로, 낙타산(駱駝山) 또는 왕실에 우유를 공급했다고 해서 타락산이라고도 불렀다. 서울의 좌청룡(左靑龍)에 해당하는 낙산의 높이는 125m로 우백호 인왕산 338m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저녁 시간, 낙산성곽을 따라 산책하는 시민들/
내사산 중 산높이가 가장 낮은 낙산은 성벽 안팎으로 탐방길이 잘 조성되어 있어 산책하듯 걸으면서 한양도성의 다양한 모습을 살필 수 있다.

낙산공원까지 성곽을 따라 순성길이 깔끔하게 정비되었다. 산이 낮고 완만해 산책길로 그만이다. 축성시기별 성돌들이 곳곳에 자리해 한양도성을 한 눈에 공부하기에도 좋다.
서울의 몽마르뜨로 불리는 낙산공원은 도심에서 접근성이 좋고 산의 고도가 낮아 많은 사람이 꾸준히 찾는다. 성곽의 안과 밖의 옥탑방과 달동네 골목길은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지가 되면서 유명세를 더한다.
낙산 성 밖아래 위치한 '장수마을'/ 
성곽마을은 집과 골목, 계단들이 조화를 이루는 서울 근현대화 과정의 생활사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낙산구간을 오르며 왼쪽에 만나는 삼선동1가 장수마을이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일제 강점기부터 성곽위에 술집이 있었고 그 주변에 움막과 판잣집이 들어섰다고 전한다.
낙산공원에서 10분 거리인 창신숭인채석장전망대 맞은편의 카페에서 본 한양도성 낙산구간과 도심 야경

낙산구간 야경

성 안쪽으로는 벽화마을로 유명한 이화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오후 느즈막한 시간에 낙산공원을 찾았다면 일몰과 야경을 감상하고 내려오는 것이 좋다. 연인과 함께라면 인근 채석장전망대의 카페 2곳(테르트르/카페낙타)도 추천한다.

-연재 순서
① 보신각종이 울리면 한양은 깨어난다.
② 백성의 바람을 하늘에 고하다!
  (사직단에서 인왕산 선바위까지) 
③ 겸재 정선, 인왕산 바라보며 인생을 회고하다.
  (수성동계곡에서 무계정사까지)
④ 궁궐이 발아래“조선 최고의 관광, 순성(巡城)놀이”
  (창의문에서 숙정문까지)
그래픽=이희정 디자이너

⑤ 성곽따라 이어진 성곽마을 이야기
  (와룡공원에서 낙산공원까지)
⑥ 한양도성의 문은 모두 몇 개일까?
  (한양도성박물관에서 장충동골목길까지)
⑦ 우리 손으로 훼손한 한양도성
  (장충단에서 N서울타워까지)
⑧일제가 할퀴고 우리가 덧낸 남산   
  (국사당 터에서 통감관저 터까지)
⑨ 대한제국 서구에 문 열다.   
  (숭례문에서 돈의문 터까지)
⑩ 한양도성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될까?
   “함께 걸어요” 한양도성 순성길

kkkwak7@kukinews.com
곽경근 기자
kkkwak7@kukinews.com
곽경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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