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이 두고 온 삶은 어떤 형태를 띠고 있을까.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감독 셀린 송)는 제목 그대로 전생을 이야기한다. 태어나기 전이 아닌 떠나오기 전 삶을 그린 이 작품에서 배우 유태오는 떠나온 곳에 그대로 존재하는 사람을 연기한다. 평생을 이방인으로 살아온 그가 한 곳에 뿌리내린 사람이 되다니. 지난달 29일 서울 소격동 한 카페에서 만난 유태오는 “문화 배경을 생각해야 하는 연기에 재미를 느꼈다”고 했다.
당장 닥치지 않은 일엔 현실감을 느끼지 않는 유태오에게 ‘패스트 라이브즈’는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각본을 처음 읽던 날 그는 자부심과 감동에 휩싸였다고 한다. “동양 철학이 담긴 인연이란 개념을 해외 관객도 편하게 이해할 수 있어서”다. 연기하면서는 “인생이 바뀌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유태오는 “여한 없는 슬픈 아름다운, 경쾌하지만 슬픈 아련함이 나오게 연기하려면 나 역시도 인연을 믿어야만 했다”면서 “인연을 알자 연기자의 삶도 달라졌다”고 돌아봤다.
“이전까지는 연기할 때 기술적인 요소에 의존했어요. 하지만 캐릭터와 제가 인연으로 연결돼 있다고 생각하니까 역할에 이입하기 위해 스스로를 설득할 필요가 없어지는 거예요. 그 후로는 유진한(tvN ‘머니게임’)처럼 저를 상업적으로 상품화할지, 작품을 통해 얻은 철학을 개입시켜 연기자로의 길을 탐구할지를 고민했죠. ‘패스트 라이브즈’ 이후 코미디와 드라마 장르에 각각 도전했어요. 드라마는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과정주의적 장르인 반면 코미디는 웃음을 자극해야 하는 결과주의적 장르잖아요. 인연이라는 개념을 대입시켜 연기해 보니 장르에 따라 정신이 육체를 바꿔놓더라고요.”
깨달음을 얻기 전 유태오가 겪은 고뇌의 흔적은 ‘패스트 라이브즈’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극에는 해성의 대학생 시절과 30대인 현재가 순차적으로 나온다. 그는 목소리 높낮이부터 몸동작, 눈빛까지 많은 부분에서 미세한 차이를 뒀다. 특히나 공 들인 건 나영과 재회한 30대의 해성이다. “첫사랑을 끝맺기 위해 달려온 10년의 세월”을 떠올리며 매 장면을 준비했다고 한다. 유태오는 해성의 근원에 ‘한’이 있다고 봤다. “환경을 받아들이거나 변화시키지 못하는 억울함”을 잘 이해한 만큼 해성에게 끌렸단다.
유태오 역시도 해성과 비슷한 마음을 느낀 적이 있다. 15년가량의 무명 생활 당시 느낀 울적함과 평생을 어디에 속하지 않고 자라온 이방인의 아픔이 그렇다. 유태오는 “어떤 문화든 그 나라의 단어로 인식할 수 있는 독자적인 감수성이 있다”며 “어디서든 그곳 문화에 맞춰 살 순 있지만 그와 별개로 느끼는 외로움은 필연적”이라고 했다. 다만 배우로서 보내는 삶이 이를 슬픔 아닌 무기로 승화시켰다. 유태오는 “한 문화 속 감수성을 다른 나라 언어와 매치시킬 때 나오는 재미난 연기는 나만이 할 수 있다”고 힘줘 말했다. 독일에서 태어나 뒤늦게 한국 땅을 밟은 그는 혼란을 딛고 천직을 찾았다.
“모든 배우에겐 결핍이 있어요. 인정욕구를 솔직하게 드러내느냐 않느냐의 차이예요. 저는 당당한 사람은 아니지만 제 단점을 인식하려 해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문제를 인식할 수 있죠. 그 결과값이 연기고요. 이방인으로 살아오면서 문화의 다름을 늘 느껴왔어요. 그때마다 외로웠지만 지금은 감사해요. 여러 문화권을 겪은 만큼 제가 표현할 감수성의 폭이 넓어진 거잖아요. 이방인으로서 겪은 모든 경험이 배우 유태오를 만든 거예요. 주어진 팔자가 있다지만, 제 아픔이 누군가의 오락일 수 있다면 그 또한 긍정적인 해소법 아닐까요? 제게 연기가 그래요.”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