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불확실성 등으로 원달러 환율이 단기적으로 1500원을 돌파할 가능성에 점차 무게가 실리고 있다.
31일 서울 외환시장에 따르면 원달러 환율은 전일 주간거래 종가(1467.5원)보다 5원 오른 1472.50원에 장을 마감했다. 30일은 올해 마지막 거래일로, 이날 서울 외환시장은 휴장을 했다가, 내년 1월2일에 2025년 외환시장이 열린다.
환율 연간 상승폭은 184.5원(14.32%)으로 외환위기 이후 최대폭이다. 2023년 23.5원(1.8%), 2022년 75.5원(6.4%)의 배를 넘는 수준이다.
원달러 환율은 계엄 사태 이후 매서운 속도로 상승했다. 앞서 지난달 말 1400원선 부근에서 등락하던 원달러 환율은 지난 3일 윤석열 대통령 비상계엄 선포로 야간 거래에서 순식간에 1442.0원까지 치솟았다.
원달러 환율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안 1차 표결이 무산된 뒤 1430원대로 올라서더니 지난 19일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금리인하 속도조절을 시사하자 1450원대로 뛰어올랐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가 탄핵당한 지난 27일에는 1487.7원까지 튀어 올랐다. 금융위기 당시 2009년 3월 16일 장중 기록인 1488원 이후 15년 9개월 만에 최고 수준이다.
금융당국은 국무총리 탄핵으로 정치적 불확실성이 더욱 증대됐다며 우려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전날(30일) 오전 서울 중구 은행연합회관에서 ‘긴급 거시경제·금융현안 간담회’를 주재해 한 국무총리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것과 관련 “환율 상승 등 금융·외환시장 변동성이 확대됐다”면서 “국내 정치 상황이 조속히 안정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진단했다.
아직까지는 대응 여력이 충분하다는 게 정부·한은의 공식 입장이다. 한국의 순대외금융자산은 지난 3분기 기준 9778억달러에 달하며, 외환보유액은 4154억달러로 세계 9위 수준이다. 정부와 한은은 쏠림 현상이 과도하게 나타나는 경우 추가적인 시장안정조치를 적기에 실시하기로 했다. 앞서 27일에도 한은은 시장 안정을 위해 5조원 규모 환매조건부증권(RP)을 추가 매입했다. 비상계엄 공포 이튿날인 이달 4일부터 이날까지 RP매입으로 공급한 단기유동성 규모는 총 38조6000억원에 이른다.
환율 고공행진에 은행들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가계대출 영업에 제동이 걸린 국내 시중은행들은 올해 기업대출을 늘려왔다. 은행권은 고금리·고물가에 고환율까지 악재가 겹치며 기업 부실 대출 리스크가 자칫 전이될 지 모니터링하고 있다. 긴급 임원 회의를 소집하는 등 내부 점검을 강화하는 분위기다. 임종룡 우리금융 회장은 지난 29일 지주 임원을 소집해 긴급 현안 점검회의를 열고 환율, 금리 등 금융시장 변수들에 대해 “장기적 관점에서 긴 호흡으로 대응해달라”고 당부했다. 임 회장은 수입업체 등 고환율 취약업종과 개인사업자 등 경기민감업종 모니터링을 강화하고, 실물경제 유동성 공급이 차질 없이 이뤄질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여달라고도 강조했다.
대출 문턱이 높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환율이 급등해 은행권의 외화 유동성 공급에 차질이 생기면 은행 위험가중자산(RWA)이 증가한다. 은행권은 담보가 확실한 차주나 우량기업 위주로 대출을 실행하고, 대신 중소기업대출과 개인사업자대출을 조일 가능성이 높다.
권아민 NH투자증권 연구원은 보고서를 통해 “지금은 대내 정치 불확실성이 환율의 단기 변동성을 높이는 상황”이라며 “가장 가능성 큰 시나리오는 아닐 수 있지만, 추가 탄핵과 외국인 자금 이탈이 실제로 이뤄질 경우 1500원을 넘길 수 있다”고 내다봤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 역시 지난 29일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를 통해 “3~4%의 환율 변동은 통상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바, 원달러 환율의 1500원 도달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내년 전망도 어둡다. 한은은 달러화 강세가 내년 초 미국 트럼프 행정부 출범 후에도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한은 외자운용원은 보고서에서 “내년 중 달러화는 트럼프 정부 정책 시행에 따른 디스인플레이션 정체 우려와 연준 고금리 장기화 가능성 등으로 강세를 보일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