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영화 ‘스무해 첫째날’로 데뷔해 36년간 정상의 자리를 지켜온 배우 김희애에게 연기란 현재진행형의 일이다. 최근 ‘밀회’ ‘미세스캅’ ‘사라진 밤’ 등 드라마와 영화를 넘나들며 다양한 캐릭터를 선보였던 그는 ‘허스토리’(감독 민규동)의 문정숙 역을 맡아 새로운 모습을 선보인다.
오랜 시간 한 길을 걸어온 김희애에게 영화 ‘허스토리’(감독 민규동)의 문정숙은 새로운 이정표가 될 것으로 보인다. 김희애가 연기한 문정숙은 위안부 할머니들을 이끌고 일본에 소송을 제기하는 원고단 단장이다. 시종일관 당당한 모습으로 “할머니들을 위해 이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인물. 원하는 바를 위해 행동하는 주체적이고 입체적인 캐릭터다.
인터뷰를 위해 최근 서울 팔판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희애는 ‘허스토리’ 출연에 관해 “영화가 민간인 사업가와 위안부 할머니들이 함께 이뤄낸 평범한 승리를 다룬다는 점에 끌렸다”며 “재판에서 일부 승소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기적 같은 일이다. 영화로나마 뒤늦게 알게 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운을 뗐다.
처음부터 큰 사명감을 지녔던 것은 아니다. 김희애는 “어려운 시절을 보내셨던 할머님들이 일본 재판장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것이 와 닿아 작품을 선택했다. 하지만 작품을 준비하고 몰입하다 보니 점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고 털어놨다.
그동안 잘 몰랐다는 부끄러움을 떨치기 위해 김희애가 할 수 있는 것은 진심을 담은 연기뿐이었다. 김희애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진심으로 연기해 티끌만한 노력을 보태는 것이었다”며 “관객들이 저희가 만든 영화로 작게나마 감동을 받았으면 좋겠다”라고 밝혔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상처를 마주하며 점점 변해가고 끝내 ‘혼자만 잘 먹고 잘 살았던 것이 부끄럽다’라고 말하는 영화 속 문정숙과 닮은 셈이다.
김희애는 ‘허스토리’의 문정숙이 되기 위해 겉모습을 바꿨다. 캐릭터 이미지에 어울리도록 머리를 잘랐고 체중을 증량했다. 김희애는 입체적인 성격의 문정숙을 연기하는 것이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한 명의 인간으로서 존재감을 보여줄 수 있는 역할을 연기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고.
“그동안 머리카락을 자르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니에요. 다만 배우는 언제나 다음 작품을 염두에 둬야하기 때문에 언제나 기르고 있는 상태였죠. 언젠가는 여자 배우가 할 만한 역할이 얼마 없으니, 머리를 자르고 남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농담한 적도 있어요. 이번엔 캐릭터에 맞게 머리를 짧게 자르게 됐네요. 문정숙이 인간의 존재감을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라 정말 감사했어요. 제 나이 또래 배우들은 주체적인 역할을 맡기 더 힘들잖아요. 배우로서 큰 터닝 포인트가 됐어요.”
이번 작품을 통해 배우로서 전환점을 만났다는 김희애는 ‘영화 ’아이 캔 스피크‘(감독 김현석)로 영화제 주연상을 휩쓴 배우 나문희를 언급하며 앞으로도 꾸준히 그리고 활발히 연기 활동을 펼치고 싶다는 소망을 드러냈다.
“어릴 적엔 지금 이 나이에 계속 연기자 생활을 할 수 있을까 두려움 같은 것도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죠. 돌이켜 보면 그런 생각을 했던 20대가 더 컴컴한 미지였어요. 지금은 환해요. 충분히 일을 할 수 있는 나이죠. 나문희 선생님이 ‘아이 캔 스피크’ 작업하시는 걸 보고 너무 존경스러웠어요. 저나 동료들이 현장에서 현실감 있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도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해요. 오랫동안 현역으로 일하고 싶어요. 우리 인생이 길잖아요.”
인세현 기자 inout@kukinews.com / 사진=YG엔터테인먼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