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한성주 기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는 질문 세례를 받는다. 그동안 훈련 여정, 경기 당일 컨디션, 긴장감을 다스리는 방법 등 영웅의 비결에 전 국민의 호기심이 집중된다. 선수의 인생사는 물론 ‘민트초코’ 맛을 싫어한다는 사소한 취향까지 영웅담으로 재구성된다.
여자양궁 국가대표 안산(20·광주여대)은 다른 질문을 받았다. 안산의 인스타그램에는 ‘머리를 왜 자르나요?’라는 댓글이 찌푸린 표정의 이모티콘과 함께 달렸다. 안산은 ‘그게 편하니까요~’라며 미소짓는 이모티콘으로 응수했다. ‘머리가 짧든 길든 상관없습니다. 페미면 물어뜯을 것이고 아니라면 응원할 것입니다’라는 댓글도 등장했다. 안산을 향한 질문은 영웅담의 소재를 발굴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선수의 역량과 무관한, 머리카락을 짧게 유지하는 저의를 추궁하는 질문이 이어졌다.
머리카락이 짧은 여성을 향한 단발 단속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숏컷’이 탈코르셋 운동과 페미니즘의 상징으로 여겨지면서다. 숏컷을 한 여성 유명인들에게는 머리카락의 길이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이들이 몰려든다. 최근 프로야구 LG 트윈스 치어리더 하지원은 인스타그램에 숏컷을 한 자신의 사진을 올렸다가 ‘페미니스트 아니냐’는 질문 세례를 받았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그가 머리카락을 자른 이유를 추측하기 위한 대토론이 벌어졌다. 하 씨는 ‘저는 페미니스트와 무관하다’고 해명에 나섰다.
평범한 여성들도 머리카락이 짧으면 경계 대상이 된다. 지난 3월 숏컷을 하고 카페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러 갔더니 ‘혹시 페미니스트냐’는 질문을 받았다는 면접 후기가 공유돼 논란이 일었다. 당시 면접자가 “페미니스트와는 결이 맞지 않아 당신을 채용하지 않겠다”는 말을 듣고 불합격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카페에 대한 불매운동이 진행됐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머리카락이 짧은 여성의 일상은 평화롭지 않다. 숏컷을 한 여성들은 “고작 머리카락을 잘랐을 뿐인데, 갑자기 사람들이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고 입을 모았다.
이 모씨(25세): “학교 앞 번화가에서 친구들끼리 같이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모르는 남자들이 우리 사진을 함부로 찍었어요. 그리고 그 사진을 인터넷 커뮤니티에 ‘페미니스트들이다’라는 글과 함께 게시했더라고요. 이런 걸 ‘박제한다’고 하거든요. 사진 속 당사자들이 마음대로 지우지 못하게 인터넷에 기록을 담겨둔다는 의미예요. 우리가 뭔가를 잘못해서 사진이 찍힌 게 아니라, 단지 외모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한거예요. 머리카락 짧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너무 화가 났고, 이상한 편견을 깨는 데 앞장서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 일 이후로는 사람들의 시선이나 외모에 대한 간섭에 굉장히 예민해졌어요.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무섭기도 해요. 모르는 사람이 아무 이유 없이 저를 공격한 거잖아요.”
김 모씨(25세): “학교에서 대외활동을 같이하는 친구가 있었는데요. 그 친구가 여자대학교를 다니고 있고, 머리카락이 짧았어요. 그런데 제 남사친(남자 사람 친구)이 그 친구를 가리키면서 ‘여대에 다니면서 숏컷인 여자애들 보면 무서워’라고 말했어요. 당최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 없었죠. 고작 머리카락 하나 자르는 것만으로 남자들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니. 숏컷을 한 여자들이 모두 페미니스트는 아니잖아요. 게다가 페미니스트면 또 뭐가 어때서?”
조 모씨(27세): “처음 숏컷을 한 날, 모두가 제 정신건강과 심경의 안부를 걱정하면서 머리카락을 왜 잘랐냐고 물었어요. 저는 ‘그냥 잘랐다’는 대답만 반복했죠. 공공시설에서는 제 몸을 유심히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의식돼요. 한 번은 머리카락을 아주 짧게 자르고 옷가게에 갔는데, 가게 직원이 판매를 거부했어요. ‘이 옷은 남성용이라 당신에게는 팔지 않겠다’고 했죠. 저는 지금 사회에 나가야 하는 석사 졸업생인데요. 당장 머리카락을 짧게 자를 수 있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대답을 망설일 것 같아요. 대놓고 지적하는 이상한 사람한테는 맞설 수 있지만, 조직 내에서 받는 암묵적인 강압과 눈치는 견딜 자신이 없거든요”
머리카락이 짧은 여성의 삶이 피곤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숏컷에 대한 경계심의 이면에는 가부장제 사회에 대한 염원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 전문가의 분석이다. 페미니즘 철학자인 윤김지영 창원대학교 철학과 교수에 따르면 전통적인 가부장제 사회에서 이상적인 여성은 길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가졌다. 여성들이 머리를 짧게 자른 모습은 가부장제 사회의 요구사항을 따르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여겨진다.
윤김 교수: “우리나라와 같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 유명인은 욕망의 대상이 됩니다. 아름다운 외모와 상냥하고 따듯한 성격을 지니기를 강요받습니다. 그런 여성이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면, 일부 남성 소비자들은 ‘저 여성은 더는 우리에게 잘 보일 마음이 없다’고 생각하며 공격성을 드러냅니다. 욕망의 대상을 자처하지 않는 여성은 페미니스트로 간주하고, 신념을 검증하려고 추궁하는 이분법적 사고방식도 표출됩니다. 그 여성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든, 얼마나 대단한 역량을 지녔든 관심을 두지 않죠.”
“무대응이 최선입니다. 올해 상반기 기업들이 페미니즘 커뮤니티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손가락 모양과 비슷한 이미지를 사용한 것에 대해 사과하는 일이 연쇄적으로 있었습니다. 가치관을 감별하려 드는 질문에 여성들과 기업들이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죄송하다’ 등의 불필요한 해명을 반복한다면, 질문자들은 승리감을 느낍니다. 자신의 의견이 지속적으로 관철돼, 가부장제 사회를 유지하는 영향을 발휘한다는 착각이 강화됩니다. 머리카락을 왜 짧게 잘랐는지, 페미니스트인지 질문을 받으면 응수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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