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랑그루아 다리Ponte de Langlois>를 그린 빈센트의 작품은 유화 4점, 수채화 1점, 드로잉 4점이 있다. 그중 이 작품의 특징은 강기슭에 더 가까이 다가가 빨래하는 여인들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늘과 물은 모두 파란색으로 단순화시켰고, 하늘과 강둑의 풀빛은 운하에 반영을 이루고 있다. ‘랑그루아 다리’는 밑으로 배가 지나갈 수 있도록 열리는 도개교(跳開橋)이다. 그 명칭은 다리를 관리하던 사람의 이름에서 나왔지만, 지금은 이 그림이 더 유명해져서 그냥 ‘반 고흐 다리’라 불린다.
짙푸른 물살은 흰색,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 등 임파스토 기법으로 표현한 주변과 서로 대조적인 보색이다. 동심원과 줄 모양의 붓터치로 물살과 움직임을 묘사했다. 햇빛을 받아 반사되는 부분을 표현한 흰색은, 미술관 조명에 의해 빛을 받는다. 그래서 색채의 투명함이 블루 다이아몬드처럼 깊고 영롱하다. 아니 다이아몬드보다 영겁으로 빛나는 반짝임을 화폭에 담았다. 빈센트는 색채의 향연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랑그루아 다리는 캔버스를 가로로 긴 수평으로 분할하며 안정감을 준다. 도개교와 축대는 캔버스를 두 개의 수직으로 분할하며 운동감을 준다는 전통적인 구도를 착실히 따르고 있다.

빨래터에 있는 세탁부들이 일으키는 물결을 따라가면, 다리 위를 지나는 마차로 시선이 이어진다. 전면에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들쑥날쑥한 잡초들 사이로 버려진 나룻배가 물에 잠겨 있다. 이 그림을 어느 정도 안다고 자부해 왔는데 나도 나룻배는 처음 보았다.
빈센트는 헤이그 시절 직접 제작한 원근법 프레임을 사용하여 이 그림을 마지막으로 그렸다. 그는 초반에 그린 반 고흐 미술관의 작품과 달리 자연의 본질적인 색채와 형태를 우키요에의 영향으로 추상화 하였다. 또한 자연에 기대어 사는 인간과 조화를 이루게 한 걸작이다.
크롤뢰 뮐러 미술관의 설립자인 헬렌은 이 그림을 1912년 5월 21일 후겐다이크 경매에서 구입했다. 헬렌은 네덜란드 화가 브레머(H. P. Bremmer)에게 예정가의 5배 이상으로 입찰하도록 하여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다. 그렇게 높은 가격을 주고서라도 이 아름다운 그림을 꼭 가져와야 한다는 헬렌의 강한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미술관에서 <밤의 카페테라스>와 쌍벽을 이루는 작품이다.
헬렌은 이 <랑그루아 다리>를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강력하고, 가장 수정같이 맑은” 그림이라며 자랑스러워 했다.

독일 기업가의 딸인 헬렌 뮐러가 네덜란드 안톤 크롤뢰와 1888년 결혼하여 헬렌 크롤러-뮐러(Helene Kröller-Muller)가 되었다. 남편 안톤은 선박업과 광산업에 종사하였고, 결혼 후 헬렌은 네덜란드 화가 브레머에게 그림을 배웠다.
빈센트가 죽고 15년이 흐른 뒤, 1905년 천신만고 끝에 테오 부인인 요한나 봉게르는 <형에게 보내는 편지>를 출간했다. 주목받지 못하던 유럽 전역에서 그의 전시회가 열리고 이제 그의 천재성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헬렌은 브레머의 도움으로 암스테르담 경매에서 빈센트의 작품을 수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1908년 헬렌은 경매에서 빈센트의 <나무의 가장자리, 1883>를 처음으로 구입하였다. 이후 도전적으로 경매에 참가하며, 90점 이상의 그림과 180점 이상의 스케치를 수집하게 되었다. 지금 대전시립미술관에서 크롤뢰 뮐러 미술관에서 온 반 고흐 전시가 열리고 있다. 헬렌은 빈센트가 ‘현대 미술의 위대한 정신 중 하나'라 생각했다.

목사의 아들인 빈센트는 ‘예술가로서 하나님께 봉사하는 삶’에서 생의 의미를 찾고 있었다. 인간과 자연이 하나로 일치하는 영적인 차원을 찾고 있던 헬렌은 자신과 빈센트를 동일시하고 그의 작품을 본격적으로 수집하기로 결심한다. 그녀의 예산은 사실상 무제한이었다.

헬렌은 미술관을 짓기로 하였으나, 갑자기 불어 닥친 세계 대공황은 상황을 악화시켰다. 남편이 파산한 것이다. 그러나 그림을 팔아 사업자금에 쓰지는 않았다. 이는 헬렌의 현명한 선택이었다. 가문의 사냥터 55만평과 그림을 정부에 기증하는 조건으로 미술관을 지어주면, 헬렌은 그 미술관 관장으로 생전에 봉사하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그러나 겨우 일 년뿐이었다.
이로서 네덜란드에서 가장 큰 호에 벨루에 국립공원에, 세계에서 두 번째 많은 반 고흐 작품 소장 미술관인 헬렌 크롤뢰-뮐러 컬렉션(The Collection of Helene Kröller-Muller)이 1938년 크롤뢰 뮐러 미술관으로 개관하게 되었다.

빈센트는 파리에서 거의 2년을 보내면서, 1888년 초까지 그 도시를 충분히 그렸다. 그는 일본에 가고 싶었지만, 로트렉의 권유로 대신 ‘푸른 톤과 밝은 색의 땅’인 남프랑스 아를로 내려왔다.
“나는 지금처럼 운이 좋은 적이 없어. 이곳은 자연이 매우 아름답다. 나는 그렇게 아름답게 그림을 그릴 수 없지만, 그림이 나를 너무 많이 흡수해서 아무 규칙도 생각하지 않고 나 자신을 놓아주네.” 이 문구로 그가 얼마나 아를을 좋아했는지 알 수 있다.


“투명한 공기와 찬란한 색채의 효과를 볼 수 있는 이곳은 마치 일본처럼 아름다워 보인다. 흐르는 물의 풍경 속에서 아름다운 에메랄드 빛과 선명한 파랑의 빛을 만든다...” 빈센트는 그리운 조국 네덜란드의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도개교를 아를에서 찾았다.
도시 입구에 있던 운하를 가로지르며 회색 빛 하늘을 머리에 인 그저 그런 다리다. 그림의 왼쪽 끝에는 작지만 운하와 론 강의 경계가 되는 수문이 보인다. 봄을 맞아 피어나는 풀들이 싱그러운 담녹(淡綠)과 초록의 하모니를 이룬다.
이 그림에서는 크롤뢰 뮐러 미술관 소장본과 달리, 운하에서 빨래하는 여인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건너편 강둑에는 세탁부들이 빨래를 하곤 널어놓은 린넨이 바람과 햇빛을 받으며 마르고 있다. 린넨에 표백을 하기 위해서는 불순물을 제거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몇 개의 소재들이 조밀하게 배치된 이 그림은 빈센트가 안트베르펜에서 구입했던 일본 목판화, 우끼요에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 구도를 신중하게 구상하여 이젤을 놓을 장소와 도로 전경을 대각선으로 잡았다. 이는 대담한 사선으로, 화폭을 과감하게 분할하여 역동적인 활력을 불어넣어준다.

테오는 여동생 윌에게 1888년 2월, 형이 지난 일요일에 아를로 갔다는 편지를 썼다. 형의 지식과 세상에 대한 명석한 시각은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이니, 형이 더 나이 들기 전에 유명해질 거라고 확신했다. 빈센트 덕분에 테오는 많은 화가들을 알게 되었고, 파리 구필 화랑에서 일하는 화상으로 큰 도움을 받았다. 화가들 역시 형 빈센트에 대해 좋게 생각한다며 여동생에게 자랑스레 말한다.
“형은 새로운 생각의 챔피언이거든. 물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생각한다면, 더 정확히 말해 ‘낡은 생각을 뒤집는 일’은 챔피온이라 해야겠지. 평범함 때문에 퇴보했거나 그 가치를 잃어버린 생각들에 대해 말이야.” 게다가 빈센트는 항상 남을 위해 해줄 수 있는 무언가를 찾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10년 동안 뒷바라지를 한 다정한 테오는 형의 진가를 알고 있었고, 예술에 관한 관심사로 서로 대화가 통하는 유일한 친구였다.
최금희 작가는 미술에 대한 열정으로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가지고 미술 사조, 동료 화가,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를 문학, 영화, 역사, 음악을 바탕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현재 서울시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