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 ‘탄핵 시계’가 빨라지고 있다. 조기 대선 현실화 가능성이 커졌다. 설 연휴를 앞두고 예비 후보들의 출마 선언이 줄을 잇고 있다. 본격적인 경선 레이스가 시작된 것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열리는 대선이다. 짧은 시간 안에 후보들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이뤄져야 한다. 유권자의 혜안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혼돈의 대선 정국에 나선 후보들의 경쟁력을 짚어봤다. [편집자 주]
[쿠키뉴스=정진용 기자]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 금의환향한 ‘세계 대통령’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에 대한 여론이 신통치 않다. 반 전 총장은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위협할 수 있는 인물로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귀국 당일부터 지하철을 이용, ‘서민 코스프레’라는 비판을 받은 데 이어 연일 가는 곳마다 논란을 일으켰다. ‘반풍(潘風)이 미풍에 그쳤다’는 평가마저 나온다.
■ 대선 출마, 아직도 물음표?
“나는 ‘진보적 보수주의자’다” “(촛불집회는) 기회를 봐서 참석하겠다”
반 전 총장은 특유의 ‘반반’(半半) 화법으로 유명하다. 질문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그의 대답은 듣는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대선 출마 여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난 2015년에는 “여론조사에서 빼달라”며 손사래를 치던 그는 지난해 5월 방한해 “(사무총장 임기를 마치고) 한국 시민으로 돌아오면 어떤 일을 할지 결심하겠다”고 말을 바꿨다. 정계가 술렁이자 반 전 총장은 바로 다음 날 ‘대선 출마는 확대 해석’이라고 선을 그었다. 결국 지난달 20일 미국 뉴욕에서 한국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한 몸 불사르겠다”며 대선 출마 의지를 밝혔으나, 귀국 직후엔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출마한다고 한 것은 아니”라며 또다시 발을 뺐다. 반 전 총장 측 관계자는 쿠키뉴스와의 통화를 통해 “설 직후 대선 출마 선언을 할 것 같다”고 밝혔다.
■ 문재인 위협하던 ‘잠룡’…귀국 후엔 ‘잠잠’
한때 대선후보 선호도 조사에서 1위를 차지했던 반 전 총장은 귀국 이후 지지율이 오히려 하락했다. 여론조사 전문회사 한국갤럽이 지난 10~12일 전국의 성인남녀 100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야 차기 대선주자 지지도 조사(신뢰도 95%, 표본오차 ±3.1%포인트)에 따르면 반 전 사무총장은 두 달 연속 선호도 최저치(20%)를 기록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다. 반 전 총장이 야권 대선후보들과의 양자대결 구도에서 모두 큰 격차로 밀린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나왔다. 26일 리얼미터가 지난 23일~24일 전국 만 19세 유권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전화면접 여론조사(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 결과에 따르면 반 전 총장은 문 전 대표, 이재명 성남시장, 안희정 충남지사에 모두 20%에 가까운 격차로 열세를 보였다.
■ 공무원은 ‘성공’, 정치인은 ‘글쎄’
‘반반’이라는 반 전 총장의 별명은 그가 외무부에 재직하던 시절부터 시작됐다. 지금의 ‘이것도 저것도 아닌’ 이라는 부정적인 뜻이 아니다. “반기문의 반만큼 해라”는 칭찬의 줄임말이었다. 이처럼 반 전 총장은 공무원으로서 탄탄대로를 걸어왔다. 그는 1970년대 외무고시에 합격한 뒤 미주국장, 외교정책실장, 외교부 장관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항상 동기들보다 승진이 빨랐다고 한다. 또 한국인 최초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타이틀은 무시할 수 없다.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남긴 성과도 있다. 지난 2015년 6월 제21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를 개최한 것은 그가 남긴 최대 업적이다. 또 반 전 총장은 미얀마 민주화, 남수단 독립, 지난 2014년 서아프리카에 창궐했던 감염병 에볼라에 적극 대응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아킬레스건’은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고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외면했다는 비판은 반 전 총장을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그는 지난 2009년 고 노 전 대통령의 국민장은 물론 여러 차례 방한해 각계 인사들을 만나면서도 봉하마을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지난 2011년 12월 뒤늦게 묘소를 찾은 것도 ‘인간적으로 실망했다’는 야권의 공개 비판이 나온 뒤였다.
본인과 친인척을 둘러싼 뇌물 수수 혐의도 제기됐다. 반 전 총장은 박연차 태광실업 전 회장으로부터 23만 달러를 수수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반 전 총장의 조카는 뇌물공여혐의로 미국 뉴욕 연방 법원에 기소된 것에 더해 병역기피자로 지명수배가 내려진 사실이 확인됐다.
또한 ‘한일위안부합의’(위안부 합의)에 대한 반 전 총장의 과거 발언은 끈질기게 그의 발목을 잡고 있다. 그는 위안부 합의에 대한 입장을 묻는 기자들을 ‘나쁜X’이라고 지칭해 한바탕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급기야 반 전 총장의 대선 캠프의 두 축인 친이명박계 정치인 그룹과 외교관 그룹 사이에서 균열 조짐이 보인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다.
반 전 총장 측 관계자는 “내부균열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면서 “오히려 문제는 캠프 내에서 반 전 총장에게 한결같이 ‘잘하고 있다’고만 말하는 것이다. 직언하는 사람이 없다”고 토로했다. 이어 “지지율 하락에 대해 위기의식을 가져야 할 때인데 참모들의 인식이 안이해 답답하다”고도 털어놨다.
■ 전문가 “검증, 시작도 안 했다”
이종훈 정치평론가는 반 전 총장의 ‘나쁜X’ 표현을 두고 “반 전 총장 연령대가 가지고 있는 낡고 고루한 인식을 그대로 보여줬다”고 혹평했다. 또 반 전 총장이 매표기에 만원 권을 한 번에 두 장을 넣어 논란이 되자 ‘프랑스 파리에 가서 전철표를 쉽게 끊을 수 있나’라고 해명한 것도 “적절치 않았다”고 덧붙였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은 반 전 총장에 대해 “대선 시기는 크게 중요치 않고 앞으로 본인이 가진 구체적인 국정 청사진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며 “반 전 총장에 대한 검증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다. 친족 비리, ‘박연차 뇌물수수 의혹’ 등 본격적인 검증이 시작되면 부담이 될 수 있다”고 봤다.
반 전 총장 측 관계자도 전문가의 의견에 일견 동의했다. 관계자는 “민생 행보를 통해 유권자들에게 확실한 정체성을 심어주는 데 실패했다. 반 전 총장이 확실한 목적의식 없이 너무 이쪽 저쪽의 정치인들을 만나고 다녔다”면서 “전략의 부재, 그리고 모호한 정체성이 현재 가장 큰 문제”라고 짚었다. 그는 “다른 사람은 다 아는 문제점을 반 전 총장과 참모만 모른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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