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인세현 기자] 가수 그리즐리는 “물건을 잘 잃어버리고 그리 똑똑하지 않은 편”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물건을 습관처럼 잃어버린다는 그는 얼마 전에도 카페에 지갑을 두고 왔다. 카페에 흐르는 음악에 집중하다가 벌어진 일이다. 그리즐리는 “한 가지에 집중하면 다른 생각을 못 하는 편”이라고 덧붙이며 웃음을 보였다.
그리즐리의 첫 번째 정규앨범 ‘아이’(i)는 그가 다른 생각을 하지 못 했던 순간이 모여 탄생한 음반이다. 제법 길었던 공백기에 무엇을 하고 지냈느냐는 물음에 그리즐리는 “놀았다”고 답했다. 작업에 대한 압박이 있으면 오히려 속도가 더뎌져 몰두할 수 있는 시간에만 작업했다는 것이다.
“놀면서 만든 정규앨범이에요. 두 곡 정도는 일주일 만에 쓰기도 했어요. 곡을 오래 붙잡고 있는 편은 아니거든요. 곡마다 다른 아티스트와 작업했지만, 전체적인 프로듀싱은 제가 했어요. 그만큼 신경을 많이 썼죠. 원래는 미니앨범을 준비하다가 이 앨범이 저에게 가장 소중한 음반이 될 것 같아서 정규로 전환했어요.”
1년간 “놀았다”고 간결하게 말한 그리즐리의 놀이터는 작업실이었다. ‘폴링 다운’(Falling Down)을 처음 프로듀싱한 후 음악적 욕심이 생겨 곡 작업에 매진했다. 매일 작업실에 나가 영화를 보고 가사를 적었다. 결국 꾸준히 음악 작업을 한 셈이지만, 그 동안 앨범을 낸 것은 아니기에 일단은 놀았다는 표현이 맞는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음원을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많은 곡을 쓰면서 능력 향상에 시간을 보냈어요. 그런 시간들이 있어서 정규앨범이 나왔다고 생각해요. 제게는 굉장히 중요한 시간이었어요. 기다리지 못하고 싱글을 냈다면 이런 결과가 나오지 못했을 수도 있죠.”
그리즐리는 오랜 시간 놀듯이 만든 앨범 ‘아이’에 그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았다. 곡 작업을 위해 해둔 메모들도 자전적인 내용이 대부분이다. 심리학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그런 영향 때문인지 자신의 깊은 곳을 살펴보려 노력한다. 1번 트랙 ‘1992’는 1992년생인 그리즐리가 어린 시절 느꼈던 감정을 고스란히 표현했다. 선공개해 좋은 반응을 얻었던 ‘미생’, 타이틀곡 ‘아이앤아이’(i&i)도 모두 그리즐리의 이야기다.
“앨범의 첫 번째 곡인 ‘1992’는 제 어린 시절을 잘 설명해주는 노래예요. 형은 유치원에 다녔고 저는 미술학원에 다녔는데, 어린 마음에 그게 너무 싫었어요. 저도 유치원에 다니고 싶었거든요. 노란 유치원 버스를 볼 때마다 부러웠어요.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하다가 운동장의 정경이나 버스 소리 같은 것들을 음악에 녹여냈죠. 2번 트랙인 ‘미생’은 20대 초중반의 이야기고요. 타이틀곡인 ‘아이앤아이’는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를 돌아보는 노래예요”
앨범에 관해 긴 설명을 이어가던 그리즐리는 불쑥 “사실 타이틀로 하고 싶었던 노래는 따로 있었다”고 고백했다. 7번 트랙 ‘테오’(Theo)는 그가 그만큼 아끼는 노래다. 영화 ‘허’(Her)를 보고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 제목도 영화 남자 주인공의 이름에서 따왔다.
“영화를 한 시간쯤 보다가 중간에 멈추고 글을 적기 시작했어요. 무작정 40줄 이상의 글을 쓰고 그것을 조합해서 노래를 만들었죠. 마치 제가 영화의 남자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어요. 작업했던 그 순간의 느낌이 너무 좋아서 이 노래를 가장 사랑해요. 이 앨범을 만드는 과정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죠.”
그리즐리는 “아직은 스스로 즐거운 음악을 하고 싶다”며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노래를 만들어 오히려 공감대를 얻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고 본인의 음악을 자평했다. 음악방송 출연에는 욕심이 없지만 ‘아이돌육상대회’에 나가 좋아하는 축구를 하고 엑소의 시우민과 악수를 한 것은 재미있는 기억으로 남았다.
이처럼 자신의 재미를 위해 위해 움직이는 그리즐리가 음악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즐리의 순간은 음악을 통해 타인의 순간으로 흐른다. 그리즐리는 “누군가 자신의 음악을 듣고 삶의 사소한 장면을 떠올린다면 정말 고마울 것 같다”는 소소하지만 대단한 바람을 밝히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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