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 와인을 한 방울 떨어뜨리면 붉은 빛이 마치 실타래처럼 풀려나간다. 이 붉은 실타래로 인해 멍이 든 물은 다시 투명하게 돌아오지 못한다.
유통공룡들이 만든 ‘그들만의 리그’에 중소업체가 설 곳은 없었다.
국내 수입와인업체 1위였던 금양인터내셔날은 수년간 이어진 수익성악화에 결국 지난 6월 건설사 까뮤이앤씨에 지분 79.34%를 매각했다.
최대주주였던 박재범 전 대표이사와 주요 주주의 지분이 포함돼 사실상 금양의 사력(社歷)은 끝난 것이다.
300여개가 넘는 업체들이 모인 업계에서 수위를 차지했던 기업의 마지막은 생각보다 더 처참했다. 금양의 영업이익은 2012년 31억, 2013년 13억으로 점점 줄었다. 수익성이 극도로 악화됐던 2014년에는 9000만원에 불과했다.
의아하게도 매출은 꾸준히 500억원~700억원대를 유지했다. 몸집은 유지됐지만 수익성은 뚝뚝 꺾여갔던 셈이다.
업계 내부에서는 변화하는 시장상황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자조섞인 목소리도 나왔다. 그러나 이 ‘변화한 시장상황’을 만든 것은 수입와인업체도, 소비자도 아니었다. 막대한 자금력과 영업망, 판매채널로 흐름을 바꿔버린 유통공룡들이었다.
신세계와 롯데 등 유통대기업들의 와인수입 자회사들은 자 마트·편의점 등 자사 판매채널을 효율적으로 활용했다. 소비자들의 편의점·마트 방문이 늘어날수록 각 사의 와인브랜드의 노출도 잦아졌다. 잦은 노출은 수요를 만들었고 수요는 공급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 공급은 공룡들을 더욱 살찌웠다.
자사 유통망을 활용한 원가절감으로 가격을 대폭 낮춘 저가와인들은 편의점에서, 마트에서 팔려나갔다. 실제로 2008년 설립된 신세계L&B는 연평균 매출액을 45%씩 불려가며 몸집을 키웠다. 이는 자사 판매채널인 이마트와 신세계백화점, 신세계조선호텔 등 안정적인 유통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롯데주류 와인사업부 역시 마트 등 유통망을 통해 지난해 600억원 수준의 매출을 달성했다.
후발주자인 대기업계열사들이 이러한 방법으로 몸집을 키우자 기존 와인수입업체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오프라인 매장 등을 활용한 판매로는 사실상 쫓아가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기존 업체들이 위기의 상황에서 손을 내민 곳은 결국 유통대기업일 수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대기업이 ‘손을 잡아주지 않은’ 중소업체들은 버텨내지 못하고 사라졌다.
가까스로 유통채널에 납품을 시작한 수입와인업체도 사정은 녹록치 않았다. 채널에서 요구하는 행사가격에 맞추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야했기 때문이다. 매대는 한정돼있고 납품을 원하는 업체는 많았다. 수인와인업체들은 제살깎기 경쟁으로 내몰렸다. 외형은 그대로였지만 속은 곪아만 갔다.
자사 유통망을 십분 활용한 대기업들을 힐난하는 것은 아니다. 법이 허용한 테두리 안에서 사업을 진행했고 수익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에게도 생존을 위한 먹을 것이 절실했다.
그러나 맹수에게 단번에 목이 물려 생을 마감하는 야생의 동물들을 볼 때 누구나 측은지심이 드는 법이다. 어쩔 수 없는 도태에 주제넘은 동정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겠다. 단지 그저 아쉬운, 안타까운 단상이다.
조현우 기자 akgn@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