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종의 환자샤우팅] 우리나라 의료사고의 민낯과 사과법 제정 논쟁

[안기종의 환자샤우팅] 우리나라 의료사고의 민낯과 사과법 제정 논쟁

기사승인 2018-05-10 14:10:51
글·한국환자단체연합회 안기종 대표

최근 배우 한예슬씨가 사회관계망(SNS)에 자신의 수술 부위를 찍은 사진 한 장과 함께 지방종 제거 수술을 받다가 의료사고를 당한 짧은 심경의 글을 올렸다. 그런데 이후 의료사고 피해자 입장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들이 발생했다. 강남차병원에서는 한예슬씨에게 공식 사과하는 보도자료를 두 번이나 언론방송사에 배포했다. 한예슬씨 수술 집도의사도 직접 인터넷 방송에 출연해 의료사고 경위를 상세히 설명한 후 의료과실을 인정하고 거듭 사과를 했다.

이를 지켜본 많은 의료사고 피해자들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아마 한예슬씨를 한없이 부러워했을 것이고, 의료사고 피해자를 유명인과 일반인으로 나눠 차별하는 강남차병원에는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한예슬씨가 의료사고 피해자로써 어떤 특혜를 받은 것이 아니다. 의료사고 피해자로써 당연히 받아야할 대우를 받았고, 누려야할 권리를 누렸을 뿐이다. 대부분의 의료사고 피해자들은 담당 의사의 설명이나 사과를 듣지 못하기 때문에 한예슬씨 사례로 차별과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을 것이다. 

청와대 국민신문고나 언론방송 보도에 따르면 최근 강남차병원에서 의료사고를 당한 피해자들 중에 담당 의사의 설명이나 사과를 듣지 못했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계속 나오고 있다. 이것이 강남차병원이 의료사고 피해자들을 유명인과 일반인으로 나눠 차별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는 이유이다.

작년 말 이대목동병원 중환자실에서 인큐베이터 치료를 받던 신생아 4명이 82분 동안 연쇄 사망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병원 관계자나 의료인 그 누구도 유족들에게 “최선을 다했지만 미안하다”는 한마디 위로의 말도, 사망 경위에 대한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날 기자들을 불러 언론브리핑까지 하면서 주치의는 집단사망사건 발생 이전에는 인큐베이터에서 잘 자라고 있다고 설명했던 신생아들을 “중증인 환자들이었고, 16명 중 가장 중한 환자들이 있는 구역에 있던 아이들이었다”는 무책임한 발언을 하였다. 유족들에게는 하지 않았던 사과를 기자들에게는 머리 숙이면서까지 했다.

이대목동병원으로부터 기자회견 개최 통보를 받지 못해 인터넷 기사를 보고 기자회견장에 쫓아간 유족들은 이러한 병원 관계자들과 의료인들의 책임 회피적이고, 비인권적인 행태를 지켜보다가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이대목동병원 브리핑 1순위는 언론사예요? 유족이에요?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이게!”라며 거센 항의를 했다. 이로 인해 이대목동병원은 여론의 호된 질타를 받았고 의료사고 피해자를 대하는 우리나라 병원의 민낯을 시청각적으로 보여준 대표적인 사건이 됐다.

의료사고가 형사고소나 의료소송으로 이어지는 이유는 의료사고 피해자와 병원·의료인 간의 소통 부재 때문이다. 특히 의료사고 발생 초기 형사고소나 재판의 증거가 될 것에 대한 우려 때문에 병원·의료인이 의료사고 피해자에게 위로, 공감, 유감 등의 말을 마음껏 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미국 37개 주와 영국, 호주, 홍콩 등에서 제정되어 시행되고 있는 보건의료인의 위로나 사과를 법적 책임의 증거로 사용할 수 없도록 보호하는 ‘사과법(apology Law)’ 또는 ‘환자안전사건 소통하기법(disclosure law)’을 우리나라에서도 제정하는 것에 대한 논의를 본격 시작할 때가 되었다. 최근 자유한국당 김상훈 의원이 관련 법률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사과법에 대한 우려도 있다. 의료사고 발생 시 병원·의료인이 처음에는 의료과실을 인정하는 듯 한 행동과 위로, 공감, 유감 등의 말로 피해자를 안심시키면 피해자는 부검을 하지 않고 장례를 치른 후 보상 등 병원·의료인의 조치를 일단 기다릴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병원·의료인이 의료과실을 인정한 것은 아니라 위로, 공감, 유감 등의 말을 했을 뿐이라며 오리발을 내밀면 이미 장례까지 치른 후라서 부검도 못하고 소송 의욕이 꺾인 피해자 입장에서는 난감하고 분노할 수밖에 없다. 

의료소송에 있어서 의학적 문외한인 피해자가 증거를 통해 의료과실을 입증하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처럼 어렵다. 사과법 제정 시 병원·의료인의 자백이나 사실 인정이 중요할 수밖에 없는 우리나라 의료현장 상황도 충분히 고려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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