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허스토리’(감독 민규동)의 개봉을 앞두고 서울 팔판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민규동 감독은 “영화 한 편이 태어난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라며 “관객이 각자 어떤 방식으로 ‘허스토리’를 감상할지 궁금하다”라고 운을 뗐다.
민규동 감독에게 ‘허스토리’는 운명 같은 작업이었다. 민 감독은 오래 전부터 위안부 관련 영화를 만들고자 했지만 구체화는 쉽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작업해보자는 마음을 먹고 사이판 배경의 이야기를 준비하기도 했지만, 끝내 영화화 되지는 못했다.
“사이판을 배경으로 한 위안부 소재의 영화를 준비했을 때에도 똑같은 질문을 받았어요. 부정적인 시각이 대부분이었죠. ‘관객이 보기에 불편하지 않을까.’ ‘여자만 나오는 큰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마주할 때마다 설득이 어려웠어요.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3년 정도 전엔 더 미루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모아놓은 자료를 다시 보기 시작했고 그때 발견한 것이 ‘허스토리’에서 다룬 관부재판이에요.”
관부재판은 1992년부터 1998년까지 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를 오가며 진행된 재판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관련 재판 사상 처음으로 일부 보상 판결을 받아낸 재판이지만, 지금껏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허스토리’는 당시 관부재판의 원고단을 이끌었던 실존인물 김문숙 여사와 재판에 참여했던 위안부 원고단의 이야기를 다룬다.
“평범한 사람이 나라의 도움 없이 6년간 재판을 뒷바라지 했고 지금도 작은 역사관을 운영하며 그 재판에 대해 알리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전 세계적으로 위안부에 관련된 여러 투쟁이 있지만, 이렇게 고독하면서도 고집스러운 싸움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했죠.”
재작년 민규동 감독이 영화 속 문정숙(김희애) 역할의 모델이 된 김문숙 여사를 직접 만나며 ‘허스토리’의 제작은 급물살을 탔다. 민 감독은 “실존 인물들에게 강한 에너지를 받았다”며 “위안부를 옆에서 바라봤던 문정숙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내자 진전이 쉬웠다”고 털어놨다.
“극 중 문정숙의 모델이 된 김문숙 여사가 정말 호탕하세요. 한 번 분노하면 멈추지 않는 성격이나, 엄청난 멋쟁이었다는 점이 문정숙과 닮았죠. 실제로 부산에서 성공한 사업가였고 여성의 전화를 운영하며 에세이를 7권이나 집필하기도 하셨어요. 이런 인물을 바탕으로 영화에서 잘 재현되지 않았던 여성 캐릭터를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고집스러움과 유연함, 무거움과 가벼움을 모두 가진 그런 캐릭터요.”
민규동 감독의 이런 목표는 ‘허스토리’에서 충분히 구현됐다. ‘허스토리’의 문정숙은 한국 영화에서 보기 드문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다. 더불어 이 영화에는 다양한 여성 캐릭터가 넘쳐난다. 민 감독은 이러한 역할 활용에 대해 “영화 속 모든 인물을 여자가 하는 이야기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의도적인 인물 배치로 신선한 균형감을 찾고 싶었어요. 일부러 여성의 목소리를 크게 배치한 거죠. 실제로 여성들이 해낸, 권력의 도움 없이 해낸 승리의 쾌감을 의도적인 젠더 배치를 통해 풀어가 보고 싶었어요. 영화의 관성적 표현을 전도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컸죠.”
민 감독 설명을 종합해 보자면 ‘허스토리’는 문정숙의 성장기이자 평범한 사람들의 연대기, 전쟁이 나오지 않는 반전 영화다. 아울러 ‘허스토리’를 접한 관객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영화의 표정을 그려낼 것이다. 민 감독은 “관객이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보기 전과 아주 미세하지만 다른 삶을 살 수도 있다는 기대가 있다”고 조용히 웃음 지었다.
영화 ‘허스토리’는 27일 개봉된다. 12세 관람가.
인세현 기자 inout@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