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시 무렵 글라스미어를 떠나 에든버러(Edinburgh)로 향했다. 글라스미어에서 에든버러까지는 버스로 3시간 반이 걸린다. 글라스미어를 떠나 30분정도 지나면 주변 풍경이 바뀐다. 스코틀랜드 남부 고지대로 진입하는 듯, 도로도 오르막길이고 주변 산세도 조금씩 달라진다. 산등성이가 둥그스름한 것이 우리나라 야산을 닮았다.
스코틀랜드 로우랜드의 산세가 그렇단다. 산꼭대기에서 밋밋하게 흘러내리는 초지에는 양떼와 소떼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소들을 보니 지난 5월에 아프리카의 마사이랜드에서 본 소들과는 달리 통통하니 살집이 좋다. 소도 태어난 땅에 따라서 생김이 다르다는 게 신기하다.
브리튼섬은 꼬리를 앞으로 잔뜩 말고 있는 해마를 닮았다. 해마의 머리에 해당하는 스코틀랜드 지형은 크게 북부의 하일랜드(Highland), 중부의 벨트(Central Belt), 남부의 고지대(Southern Upland)로 구분한다. 중부의 벨트와 남부의 고지대를 묶어서 로우랜드(Lowlands)라고도 한다. 하일랜드와 로우랜드 사이에는 하일랜드 경계 단층(Highland Boundary Fault)이 있다.
M6고속도로에 올라 속도를 내니 어느새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경계를 넘은 모양이다. 6시 무렵 스코틀랜드의 휴게소에 들렀다. 그 사이 비를 쏟아냈던 구름이 어느 정도 흩어지며 시나브로 비가 멎었다. 정말 이 동네 날씨는 변덕이 장난 아니다.
휴게소에서는 가로등에 앉아 쉬던 새에 눈길이 간다. 가까운 곳에 바다나 강이 있는 듯 갈매기로 보이는 새는 짙어가는 구름이 심상치 않은 듯 살피다 어딘가를 향해 힘차게 날갯짓을 시작한다. 휴게소를 떠나 다시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보니 버스는 어느새 에든버러 시내를 달리고 있었다.
에든버러는 1437년부터 스코틀랜드의 수도다. 로마제국 시절 브리튼섬의 북동부에 살던 고도딘(Gododdin)족이 세운 도시로 브리소닉어로 ‘구릉 위에 세운 요새’라는 의미의 딘 에이든(Din Eidyn, 에이든 요새)에서 유래했다.
4세기경의 것으로 보이는 웰시어로 쓰인 옛시 Y 고도딘에 “에이든의 높은 장벽”을 노래한 구절이 있다. 딘 에이든이 뒷날 이 지역에 들어온 앵글족의 한 갈래인 베르니시아(Bernicia)에게 전해지면서 에딘-버르(Edin-burh, 즉 에드윈 요새)로 바뀌었다가 고대 영어에 들어온 것이다.
에든버러는 올드 리키(Auld Reekie), 엠브라(Embra) 혹은 엠브로(Embro)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묵은 연기’라는 의미의 오드 리키라는 별명은 이 지역의 난방방식과 관련이 있다. 오래 전부터 석탄과 나무를 태워 난방을 했는데, 굴뚝에서 나온 연기가 온 도시를 뒤덮고 있었기 때문에 생긴 별명이다.
인구 51만3210명(메트로지역 포함하면 133만9380명)인 에든버러는 스코틀랜드에서는 글래스고 다음으로, 그리고 영국 전체에서는 일곱 번째로 큰 도시이다. 중세부터 형성된 구시가지는 에든버러 성과 홀리루드 궁전을 잇는 로열 마일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클로즈(Close)라 불리는 좁은 골목길 뒤편에 위치한 여러 시장, 성 자일스 교회와 같은 중세 유적과 스코틀랜드 국립 박물관이 있다. 한편 1880년대 들어 구시가지의 인구를 분산시킬 목적으로 신시가지를 건설했다. 조지 스트리트를 중심으로 발전한 신시가지에는 스코틀랜드 자치정부 총리의 관저인 부트 하우스가 있다.
에든버러는 금융업과 관광업이 성하다. 에든버러축제가 유명하고, 그 중 매년 8월 열리는 에든버러 페스티벌 프린지(Edinburgh Festival Fringe)는 1999년 참가한 ‘난타’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그 이후에도 ‘점프’ 등 주목받는 작품이 발표됐으며, 2017년에는 우리나라에서만 무려 19개 팀이 참여하는 등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프린지 축제 기간 중에는 다양한 형식의 공연이 이뤄지는데, 거리 공연은 물론 실내공연도 무료인 것과 유료인 것이 있다.
하늘이 잔뜩 찌푸리더니 버스가 숙소에 도착할 무렵 비가 한바탕 쏟아진다. 저녁식사를 시작할 때만해도 에든버러 야경을 보러가는 일정이 취소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저녁을 먹고 나서 가이드로부터 야경을 보러가자고 전화가 왔다. 창문을 열고 보니 구름이 걷혀가고 있다. 서둘러 외출준비를 하고 로비로 내려갔다.
일부는 숙소에 남고 나머지 일행은 택시 세대에 나누어 타고 엘리펀트 하우스(The Elephant House)로 향했다. 작가 조앤 롤링이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를 썼다는 카페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이 책이 발표됐는데, 서점에 줄을 서서 기다렸던 기억은 없다.
다만 영미권에서 많은 사람들이 열광한다고 해서 사 읽었던 기억이 있다. 영국식 영어표현이 익숙하지 않은 탓에 꽤 어려웠던 것 같고, 결국 귀국해서는 번역판을 다시 읽고서야 전체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엘리펀트 하우스를 포함한 에든버러의 몇몇 카페가 해리포터의 탄생지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해리포터 연작의 첫 작품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은 포르투갈의 포르투에서 잉태되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조앤 롤링은 1991년부터 1993년까지 포르투에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머물렀다.
포르투에는 해리포터에 등장하는 장면과 흡사한 여러 요소들이 있다고 한다. 릴로서점(Livraria Lello)은 작품 중 다이곤 앨리에 있는 고급서점 플로리쉬앤블롯(Flourish and Blotts)을 연상케 하고, 포르투의 대학생들이 걸치는 검은색 망토 유니폼은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것과 비슷하며, 사자분수(Fonte dos Leões)에 있는 날개달린 사자상은 그리핀도르 기숙사의 상징과 흡사하다. 심지어는 포르투갈의 유명한 작가 페르난도 페소아(Fernando Pessoa)의 안경 쓴 모습이 해리포터를 닮았다.
우리 가이드는 조앤 롤링이 에든버러에서 일할 때 엘리펀트 하우스의 주인이 시외에 있는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릴 때 편의를 봐주었다고 설명했다. 버스가 너무 드물게 있어 기다리는 동안 추위를 피할 곳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주인의 그런 호의를 갚겠다는 롤링에게 주인은 해리포터 연작의 초판본을 부탁했다고 한다. 엘리펀트 하우스의 전면에는 해리 포터가 탄생한 곳이라고 적혀있고, 뒤편 홀에는 조앤 롤링에게 고정적으로 제공한 좌석이 있다고 표시하고 있다.
1997년에 영국의 브룸스베리(Bloomsbury)출판사에서 처음 내놓은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은 1990년 6월부터 1995년 어느 시기까지 쓰였다고 한다. 1990년에 남자친구와 맨체스터에 싸구려 아파트를 구하기 위해 갔다가 런던으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마법사 해리포터의 이미지를 떠올렸고, 매일 저녁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쓰기 시작했다고 했다. 포르투에서도 책 쓰기를 이어갔을 것이다.
1993년 12월 롤링이 포르투에서 여동생이 살던 에든버러로 갈 때,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은 3개의 장만 마친 상태였다. 마법사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고아소년 해리포터가 볼더모트라는 악한 마법사와 대결하며 훌륭한 마법사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해리포터에는 1990년 12월 어머니의 죽음, 1994년 포르투에서 만난 남편과의 이혼 이후에 겪은 우울증 등에서 얻은 영감이 녹아있다.
에든버러에서 살면서부터 그녀는 여러 카페를 전전하면서 책을 완성했다. 특히 제부가 운영하는 니콜슨카페(Nicolson's Café)와 엘리펀트 하우스를 많이 이용했다. 작가 자신은 부정했지만, 난방이 되지 않는 아파트에서 잠든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카페로 가서 책을 썼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리고 보면 해리포터는 런던에서 잉태하여, 포르투를 거쳐 에든버러에서 완성되었다고 보아야겠다.
엘리펀트 하우스에서는 롤링의 흔적을 찾아 이리저리 몰려다니다 나왔다. 영업 중인 가게에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다음 일정 때문에 한가롭게 앉아 차를 즐길 시간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엘리펀트 하우스를 떠난 일행은 저물어가는 거리를 지나 존 낙스가 목회했던 세인트 자일스 교회(St. Giles’ Cathedral)까지 걸어갔다.
교회 아래편 로열마일거리에는 아담 스미스의 동상이 서 있다. 옛날 시장이 있던 장소이다. 아담 스미스의 시선은 언덕 아래 그가 살았고 죽은 뒤 묻힌 캐논게이트(Canongate) 방향으로 상업과 무역의 상징인 리스(Leith) 항구, 그리고 바다 건너 그가 태어난 스코틀랜드 피페(Fife)주를 향하고 있다. 동상은 아담 스미스 연구소의 소장 이몬 버틀러(Eamonn Butler) 박사가 제작비의 대부분을 제공하고, 알렉산더 스토다트(Alexander Stoddart)가 제작하였다. 2008년 7월 4일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버논 스미스(Vernon Smith)에 의해 제막이 됐다.
경제학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아담 스미스는 고전경제학의 대표적인 이론가로서 자본주의와 자유무역에 대한 이론의 깊이를 더했다. 1776년 발표한 저서 ‘국부론(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에서는 국가가 간섭하지 않는 자유 경쟁 상태에서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하여 사회의 질서는 유지되고 발전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시장경제야 말로 모든 사람들에게 만족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며, 특히 왕이나 귀족들보다도 보통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으로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