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분에 조금 늦어진 점심은 자이언트 코즈웨이에서 그리 멀지 않은 포트발린트래(Portballintrae)에 있는 베이뷰호텔 식당에서 쇠고기를 주 요리로 한 점심을 먹었다. 영국에서 쇠고기를 먹는 것이 찜찜하지만 정해진 식단이니 피할 수가 없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 한다. 조그마한 만이 내다보이는 식당은 분위기도 좋고 음식 맛도 좋다. 그런데 일행 가운데 집에서 가져왔다면서 풋고추를 내놨다.
우리나라의 경우 식물, 과일채소류, 농림산물류는 식물방역법 제11조에 따라 농림축산검역본부장의 식물검사합격증을 받은 경우에만 반출입이 가능하다. 반출입되는 식물들을 통해 식물전염병이 묻어 들어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나라에서도 사정은 같다. 풋고추를 내놓은 일행은 아마 해외여행을 자주 다녀보지 않은 모양이다.
점심 후에는 벨파스트로 출발했다. 가는 길에 있는 부쉬밀즈(Bushmills)라는 작은 마을을 세 번째로 지나친다. 2001년 인구조사에서 1319명의 주민이 사는 것으로 알려진 이 마을은 벨파스트에서 북쪽으로 97㎞ 떨어져있다. 마을 이름은 근처를 흐르는 부쉬강과 17세기에 만든 커다란 물레방아에서 유래했다.
부쉬밀즈는 블랙 부쉬(Black Bush)라는 싱글몰트 위스키가 만들어지는 곳으로 유명하다. 400년의 역사를 가졌다는 올드 부쉬밀즈 디스틸러리(Old Bushmills Distillery)에서 생산된 것이라고 상표에 적혀있다.
하지만 사실은 왕실로부터 양조허가를 받은 것이 1608년이고, 양조장은 1784년에 설립됐다. 설립된 뒤에서도 생산과 중단이 반복됐던 모양이다. 1885년 양조장이 불타 재건된 이후로 본격적인 생산이 이어졌다. 이 양조장은 연간 12만명이 방문할 정도로 관광명소가 되고 있다.
3시 무렵 벨파스트성에 도착했다. 멀리 벨파스트 항구를 내다볼 수 있는 전망 좋은 곳이다.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호사스러운 성이다. 그 정원에는 모두 아홉 마리의 고양이가 숨어있는데 모두 찾으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가 있단다.
무슨 소원을 빌을 것인지는 둘째 치고 맹렬한 승부욕이 발동한다. 젊었을 적부터 숨은 그림 찾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풍가서 흔히 하는 보물찾기에서는 한 번도 찾아본 적이 없다. 이날 도전은 아홉 마리의 고양이를 모두 찾는 것으로 끝났다. 소원은 따로 빌지 않았다. 소원을 잘 들어준다는 곳마다 빌어봤지만, 성사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12세기에 노르만 사람들이 지은 원래의 벨파스트성은 지금은 벨파스트의 도심이 된 지역에 있었다. 제1대 치체스터(Chichester) 남작인 아더(Arthur) 경은 1611년 같은 장소에 돌과 목재로 성을 지었는데, 1708년 화재로 타버렸다. 1862년 치체스터 가문의 후손인 제3대 도네갈(Donegall) 후작이 해발400m인 케이브힐 사슴공원에 새로 성을 지었던 것이 지금의 벨파스트 성이다.
성은 1870년 완공됐지만 후작은 1만1000파운드의 빚을 지게 됐고, 사위인 제7대 샤프츠베리(Shaftesbury) 백작, 애쉬리(Ashley)경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1884년 후작이 죽은 뒤, 그의 재산은 애쉬리 경에게 넘어갔고, 벨파스트시장과 퀸즈대학교의 총장을 지낸 제9대 백작은 벨파스트성을 벨파스트 시에 헌납했다.
오늘날 벨파스트성에는 골동품 가게와 레스토랑 등이 들어있고, 회의나, 결혼피로연 장소로 인기를 끌고 있다. 30여분을 머물며 아름다운 정원과 벨파스트 항구를 구경하고 벨파스트 시청으로 향했다.
도네갈 광장에 있는 시청건물은 가장 아름다운 공공건물로 알려져 있다. 이 장소는 국제 린넨 교환소가 있던 화이트 린넨홀(White Linen Hall) 자리다. 1888년 빅토리아 여왕은 린넨, 로프, 조선 및 엔지니어링 산업 등을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던 벨파스트를 도시로 인정해 시의회를 구성토록 했고, 이를 계기로 격에 맞는 시청건물을 짓기로 했다. 이후 벨파스트는 더블린을 넘어 아일랜드에서 가장 큰 도시로 성장하게 됐다.
시청건물은 바로크양식을 재현한 건축가 알프레드 브룸웰 토머스(Alfred Brumwell Thomas) 경의 설계로 1898년 짓기 시작해 1096년에 완공됐다. 건축에 사용된 석재는 영국 남쪽 도싯(Dorset)의 포틀랜드섬(isle of Portland)에서 나는 석회암을 썼다.
1에이커 면적을 차지하는 시청 건물의 네 모퉁이에는 각각 탑을 세웠으며, 중앙의 입구에는 등으로 장식한 왕관모양의 구리돔을 올렸다. 일정상 1층만을 돌아봤는데, 타이타닉 박물관을 비롯해 벨파스트 시가 발전해온 과정이 다양하게 전시돼 있었다.
벨파스트 시청의 정원에는 토마스 브록(Thomas Brock) 경이 제작한 빅토리아 여왕(Victoria Victoria)의 동상을 비롯해 벨파스트가 기억할 만한 많은 인사들의 동상이 서 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기념비도 볼 수 있는데, 우선 1912년 4월 12일 침몰한 타이타닉호의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비가 눈길을 끈다.
일반인과 조선소 노동자 및 희생자 가족의 기부금으로 제작돼 1920년 6월 제막됐다. 추모비는 한 쌍의 인어가 파도 위로 끌어올린 선원의 머리맡에 나타난 죽음 혹은 운명의 여신이 월계관을 씌우려하는 순간을 표현했다. 공포에 질렸을 탑승객을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려 혼신의 힘을 다하다 생을 달리한 선원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으로 승리의 월계관을 받아 마땅했을 것이다.
흔히 타이타닉호라고 부르는 RMS 타이타닉(Titanic)은 영국의 화이트 스타라인 소속의 북대서양 횡단 여객선이다. 첫 항해에 나설 때까지 타이타닉은 세계에서 가장 큰 3척의 올림픽급 여객선 가운데 두 번째로 건조됐다.
이 배는 벨파트스에 있는 하랜드 앤 울프(Harland & Wolff)사에서 맡아 1909년 건조를 시작해 1911년 5월 31일 진수했다. 1912년 4월 10일 승객과 승무원을 합쳐 2200명 이상이 탑승하고 영국의 사우샘프턴을 출항해 프랑스 셰르부르(Cherbourg)와 아일랜드 퀸즈 타운(Queenstown)울 거쳐 미국의 뉴욕(New York)으로 향했다.
배는 출항당일부터 항로에 유빙이 떠다닌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유빙을 감시하는 특별한 대응 없이 최고속도에 가까운 시속 22노트(41㎞)의 속도를 유지하며 항해했다. 결국 4월 14일 밤 11시 40분, 갑판선원 프레드릭 플리트가 높이 20m 정도의 빙산이 전방 450m에 출현한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항로를 좌측으로 급히 변침했지만, 너무 늦어 우현이 빙산에 부딪히면서 손상을 입었다. 바닷물이 배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빠르게 부력을 잃었고, 결국 2시 25분 침몰하고 말았다. 선장은 탈출명령을 내렸지만, 승객들은 처음에는 구명정보다는 배가 더 안전할 것으로 생각했다.
12시 45분쯤 첫 번째 구명보트가 정원 65명에 한참 못 미치는 28명을 태우고 내려졌다. 당시 타이타닉이 보유하고 있던 구명정은 모두 1178명 정도를 태울 수 있었던 것을 고려하면, 이 사고로 706명만이 구조되고 1514명이나 사망하는데 일조를 한 셈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릿이 주연을 맡고 제임스 카메론이 감독해 1997년에 개봉한 영화 ‘타이타닉’하면, 배에서 만나 사랑에 눈뜬 두 연인이 뱃머리에서 팔을 벌리고 바람을 맞는 장면만 기억에 남아있는 사람들도 많다. 필자의 다른 여행기에서도 이 장면을 연출하는 일행 이야기를 적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1등실, 2등실, 3등실의 환경과 탑승객의 모습들에서 많은 차이와 차별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재난상황에서 얌체 짓을 하는 승객과 여성이나 어린이들의 구명정 탑승을 도와주다가 끝내는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한 숨은 영웅들의 모습도 보여준다.
에드워드 존 스미스 선장을 필두로 한 대부분의 선원들은 승객들의 탈출을 돕다가 배와 함께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침몰하기 시작한 배를 버리고 제 살길을 도모한 세월호의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의 행동과 비교해 볼 일이다.
우리 일행은 골리앗 크레인들을 배경으로 서있는 타이타닉 박물관에는 가보지 못하고 오가는 버스 속에서 설명을 듣는 것으로 대신하고 말았다. 타이타닉 벨파스트(Titanic Belfast)는 RMS 타이타닉을 건조한 하랜드 앤 울프 조선소의 부지가 있던 장소로 19세기 중반 매립된 벨파스트호수 입구에 있는 퀸즈 아일랜드에 있다.
이 지역은 벨파스트의 조선업이 쇠퇴하면서 버려졌던 것을 다시 활용하기 위해 2012년 개관한 것이다. 에릭 쿠네(Eric Kuhne)의 설계팀이 디자인한 건물은 벨파스트의 조선소가 남긴 산업 유산을 나타내려 했다.
타이타닉의 선체와 같은 38m 높이의 8층 건물은 라간(Lagan) 강을 향해 타이타닉호와 올림픽호의 선수가 각을 이루는 모습을 보인다. 벨파스트 사람들은 건물이 빙산처럼 보인다 해서 빙산이라고 부른다. 모두 3000개의 은색 산화알루미늄 조각으로 덮은 건물의 외벽도 그런 생각을 거들고 있음이다.
이곳을 찾은 조석현 시인은 ‘타이타닉호-벨파스트 조선소’라는 시를 남겼다. “골리앗크레인으로 / 배를 만들다 // 뱃머리에 / 그대와 나 / 나래를 달다 // 제일 날카로운 칼이 / 제일 먼저 상처를 받는 법 // 최고의 자만이 / 자연 앞에 초라한 역사가 되는 기억의 파편들”
조시인의 시를 음미하다 보니 시인은 옆구리에 칼을 차고 있다던 임희숙 시인이 생각난다. “그럴 때 시인은 마지막 무사처럼 세상을 향해 칼질한다.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들의 목을 치고 드디어는 아름다운 것들로부터 목이 베어진다. 쉿! 그래서 시인의 칼끝은 언제나 시인 자신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그럴 때란? 시상이 떠오를 때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