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농단’ 연루 의혹을 받는 전·현직 법관들이 관련 문건을 파기하거나 침묵을 지키고 있다. 사법농단에 대한 책임을 피하려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10일 검찰 등에 따르면 대법원 재판 기밀자료를 무단 반출한 혐의를 받는 유해용(52)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은 압수수색 영장이 기각된 후 문제가 된 자료를 파쇄했다. 컴퓨터 하드디스크 등도 분해한 것으로 전해졌다. 해당 자료들이 통합진보당 해산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법외노조 심판, 강제동원 판결 지연 등 ‘재판거래’ 의혹의 핵심 증거라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검찰은 강하게 반발했다.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은 같은 날 오후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이러한 증거인멸 행위에 대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정한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일부 법관은 침묵을 지켜 논란이 됐다. 퇴임 후 ‘시골판사’를 자청해 미담의 주인공이 됐던 박보영 전 대법관의 출근길은 험난했다. 박 전 대법관은 이날 오전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 여수시법원에 첫 출근했다. 쌍용차 해고노동자 등 40여명은 법원 앞에서 박 전 대법관의 출근 시간에 맞춰 사법농단 연루 의혹을 규탄했다. 박 전 대법관은 사법농단 재판거래 의혹 중 하나인 ‘쌍용차 정리해고 무효판결 파기환송’의 주심 대법관이었다. 박 전 대법관은 취재진과 노동자들의 물음에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고 사무실로 향했다.
일각에서는 더 이상 사법농단 진상규명을 재판부에 맡길 수 없다는 주장이 일고 있다. 사법부가 사법농단 관련자의 영장을 줄줄이 기각하며 외려 수사를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는 “법원행정처와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판사들은 사법농단 진상규명을 방해하는 최대의 걸림돌을 자처하고 있다”며 “일찌감치 재판거래가 없었다고 근거 없이 예단한 대법관과 전국 법원장들은 이 사건을 스스로 재판할 자격이 없다”고 꼬집었다.
일부 법학 교수도 목소리를 내고 있다. 박찬운 한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교수는 쿠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수사과정에서 영장 기각 등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기소가 된다 하더라도 재판부를 신뢰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사법부 스스로 개혁해야 되는데 쉬워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지난 7일 SNS를 통해 “사법농단 사태에 우리가 나서야 한다”며 동료 로스쿨 교수들을 독려했다. 박 교수는 “(SNS에 글을 게재한 이후) 법학 교수 사회 내에 움직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라며 “각각 고심 중인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소연 기자 soyeon@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