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라 모르겠다”
중요한 순간, 배우 서지혜를 이끈 한마디다. 작품을 선택할 때에도, 좀비 연기를 소화할 때에도 서지혜는 고민하기보다 일단 하는 쪽을 택했다. 모든 것을 잘해야 한다는 틀에 얽매이기보다 다양한 경험을 쌓아 연기의 폭을 넓히고 싶었기 때문이다.
최근 서울 논현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서지혜는 SBS 수목극 ‘흉부외과 : 심장을 훔친 의사들’(이하 ‘흉부외과’) 의 대본을 처음 접하고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수술 장면을 최대한 실감나게 그려내기 위해 실제 수술을 집도하듯이 촬영해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과연 진짜 의사처럼 보일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앞섰지만, 서지혜는 과감하게 ‘흉부외과’ 출연을 결정했다. 연기를 하다보면 언젠가 의학 드라마에 출연할 것이고, 그 언젠가를 ‘지금’으로 만들겠다고 마음먹은 덕분이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흉부외과’를 선택했다”고 말하며 웃음을 보인 서지혜는 “처음엔 정말 쉽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서지혜는 자문의의 도움을 받아 시술의 순서를 외우고, 수술 도구를 잡는 법부터 연습했다.
“처음엔 도구 잡는 법부터 지적받았는데 점점 손에 익었어요. 실제 인턴과정을 밟고 있는 분들도 매일 연습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도 촬영 직전까지 계속 동작을 연습했어요. 시간이 지나니까 시술 순서가 자연스럽게 떠오르기도 하고, 용어들도 입에 붙었죠. 촬영하면서 의사라는 직업이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처음 수술 장면을 7시간 정도 찍고 난 다음날 일어나지도 못했어요”
쉽지 않은 장면의 호흡을 맞추며 ‘흉부외과’ 팀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돈독해졌다. 종영 이후 정기적으로 만나는 모임을 계획할 정도다. 서지혜는 촬영장에서 간식 담당이었다. 모두가 지칠 무렵, 초콜릿을 하나씩 나누어 주며 힘을 북돋는 것이 서지혜의 몫이었다. 세 아이의 아버지인 고수는 아이들의 모습이 담긴 동영상을 자랑하기도 했다. 결혼해 가정을 꾸린 모습이 부럽지 않느냐는 질문에 서지혜는 “결혼을 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났다”고 털어놔다.
“큰 힘이 될 수 있는 동반자와 가족이 생긴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에요. 그런데 요즘엔 혼자인 저를 부럽다고 하시는 분들도 많더라고요.(웃음) 언젠가 결혼을 하겠지만, 지금은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고 싶어요. 외로움이란 감정을 느끼는 것도 저에겐 도움이 될 때도 있고요.”
혼자 있는 시간에 무엇을 하는지 물으니 다양한 대답이 돌아왔다. 집 근처에 극장이 있어 혼자 영화를 보기도 하고 산책을 하기도 한단다. 최근에는 그림에 취미를 붙이고 있다. 잘 그리진 못하지만 안정을 취할 목적으로 그림을 조금씩 그리고 있다는 설명이다. 서지혜가 여러 일을 접하고 즐기는 것엔 이유가 있다. 후회를 하더라도 일단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서지혜는 “두려움을 극복해야 삶이 풍족해진다”고 말했다.
“원래 혼자서 뭔가를 잘못했어요. 그런데 문득 어느날 결국 인생은 혼자 사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죠. 주변 사람들이 하나 둘 결혼하고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져서 그랬던 것 같아요.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혼자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았는데 이게 독립적인 성장의 계기가 됐어요. 저는 제가 일하지 않을 때 ‘백수’라고 생각해요. 그 시간에 소소한 삶의 재미를 찾는 것도 중요하더라고요. 인간 서지혜로 살아가는 삶도 저에겐 유익하고, 그 시간이 제 일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니까요. 자유롭게 살기 위해 노력해요.”
올해 데뷔 15년주년을 맞은 서지혜는 “시간이 이렇게 지난 줄 모르고 일했다”고 짧은 소감을 전했다. 뒤돌아보니 좋은 쪽으로 발전해 온 것 같다는 기분 좋은 소회도 덧붙였다.
“얼마 전 팬클럽에서 지난 제 작품을 모두 모아 앨범을 제작해주셨어요. 그걸 보는데 감회가 정말 남다르더라고요. 예전에는 이런 모습이었다는 게 새삼 떠오르면서, 그때 어땠는지 생각해보니 제가 굉장히 많이 변했더라고요. 과거 서지혜가 아직 어설프고 열정만 넘치는 젊은이었다면, 지금은 조금 달라졌다고 생각해요. 이 변화는 한 순간에 이뤄지지 않았죠. 15년간 서서히 조금씩 쌓인 것들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어요. 10년 뒤엔 또 다른 서지혜가 있겠죠.”
인세현 기자 inout@kukinews.com / 사진=문화창고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