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MC:더 벙커’(감독 김병우)의 진입장벽은 높다. 한국 관객이 쉽게 공감하기 어려운 CIA와 미국 대통령 선거라는 배경 설정 외에도 촘촘하게 짜인 용병 설정과 국제정세 등. 관객이 영화의 설정을 겨우 따라잡았다 해도 속도감 넘치는 전개는 관객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최근 영화 개봉을 앞두고 서울 팔판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하정우 또한 “관객이 영화 안에 들어가기 쉽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기는 했다”고 밝혔다.
하정우는 영화의 주인공인 에이햅을 맡았다. 에이햅은 과거 한국 군대에서 부상을 입고 국제 용병으로 전직한 인물. 미국에서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살며 CIA의 어려운 미션들을 대신 수행한다. ‘PMC: 더 벙커’는 그런 에이햅이 수행하는 미션 중 가장 최고 난이도의 미션을 다뤘다. ‘믿고 보는 배우’라는 수식어를 가진 하정우에게도 대본부터 진입장벽이 느껴졌다. 수많은 영어 대사부터 게임과 같은 영화의 콘셉트, 생소한 장르에 대한 관객 반응. 모든 것이 도전이었다.
“설정부터 관객에게 쉽게 와 닿지 않는 내용이죠. 중간 총격 장면에서 나오는 구도도 생소하고, 국내 관객에게는 익숙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감독님부터가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어했고, 저도 알고 연기에 임한것이기 때문에 그저 관객분들이 잘 따라와 주셨으면 하는 마음만 가지고 있어요.”
하정우에게 가장 큰 부담은 역시 영어 대사였다. 현지인처럼 발음할지, 아니면 영어에 익숙지 않은 동양인 스테레오 타입으로 대사를 할지. 그 와중에 팀원들을 부려야 하고 영어로 급변하는 상황에도 대처해야 한다. 미국에 직접 가서 한 달 동안 영어 회화 선생님과 같이 생활하며 발음을 공부했다. 영어대사를 소화해내며 동시에 시나리오를 보고 해석하고, 이해도 해야 했다.
“‘PMC: 더 벙커’를 찍을 때의 저는 참 예민해졌던 것 같아요. 에이햅이 착한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부터 고민해야 했거든요. 보통 영화는 짧은 시간 안에 관객의 몰입을 끌어와야 하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을 이분법적으로 나눈 다음 그 중 하나를 따라가게 하죠. 하지만 에이햅은 자신이 놓인 상황에 따라 시시각각 성향이 바뀌어요. 갈팡질팡하고, 우유부단하죠. 하지만 그런 에이햅이 바뀌면서 점점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감독님의 의도가 아닌가 싶어요.”
그렇다고 ‘PMC:더 벙커’가 하정우에게 유독 힘든 작품은 아니었다. 하정우의 말을 빌리자면, 모든 작품이 그에게는 어렵고 힘들고 유독 지난하다. 단 한 번도 쉬운 작품이 없었다.
“제가 여태까지 한 40개의 작품을 했는데, 매번 새로 작품에 임할 때마다 제가 마치 리셋(reset)되는 것 같아요. 연기를 그렇게 많이 했는데 요령이 생기기는커녕 새 작품 들어갈 때마다 불안하고,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전날까지 계속 불안해하는 거죠. 그래서 아버지에게 물어보기도 했어요. 그런데 아버지도 평생 그러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때부터 ‘아, 이건 배우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거구나’ 싶어서 그냥 편하게 마음먹기로 했어요.”
하정우는 영화 ‘백두산’ 촬영을 한 달 후에 앞두고 있다. 지금도 그의 말처럼 공허하고 불안한 상태라고 하정우는 털어놨다.
“인창이란 캐릭터를 어떻게 표현할까? 어떻게 연기해야 잘하는 걸까? 계속 궁금하죠. 사실 잘 모르겠어요.”
어쩌면 ‘믿고 보는 배우’라는 수식어가 그에게 부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하정우는 또 편하게 마음먹고 ‘백두산’에 임할 것이다.
“영화 개봉 전에는 항상 비슷한 마음이에요. ‘PMC: 더 벙커’가 어떤 영화였는지에 대해서는 내년 이맘때쯤이나 돼야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저 지금은 영화가 잘 됐으면 좋겠고, 관객분들이 잘 읽어주시고 더불어 즐겨주셨으면 좋겠어요.”
이은지 기자 onbg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