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대목? 이젠 뭐 다 옛날 말이지, 그땐 참 시끌벅적했는데...”
더덕과 도라지 등 나물을 보기 좋게 정리하던 상인 김사옥씨(71)가 차가운 칼바람에 옷깃을 여민다. 이윽고 물김을 찾는 손님이 찾아오자 환한 미소로 반긴다. 조금 더 넣어달라는 넉살 좋은 손님의 한 마디에 “나도 더 팔아야해”라면서도 웃으며 봉지에 물김을 더 담아준다. 오늘의 8번째 손님이다. 명절 대목 치고는 기대 이하다. 더덕과 고사리도 명절을 맞아 꽤 넉넉히 준비했지만 찾는 손님은 거의 없다. 김씨는 “손님들이 이제 여길 오나, 남대문에서 장사한지 40년이 넘었지만, 설 대목은 이제 뭐 다 옛날일이지”라며 고개를 저었다.
설날을 이틀 앞둔 31일 남대문시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설 음식을 장만하려는 사람과 중국 관광객들, 이를 맞이하려는 상인들이 어우려져 활기가 넘쳤다. 하지만 활기찬 겉모습과 달리 상인들의 말은 전혀 달랐다. 30년째 남대문시장 갈치골목에서 장어를 팔아온 최영기(74)씨는 기자가 “설을 앞두고 장사 어떠시냐”고 묻자, “콤퓨타인가 뭔가 떄문에 이제 시장에 오지 않고도 사는데, 젊은 사람들이 여길 오겠나”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최씨는 “사람들로 북적여 보이지만 정작 물건을 사는 사람은 적다. 명절이라고 사람들이 더 사고 하진 않는 것 같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한복으로 곱게 차려 입는 ‘설빔’ 문화도 시들해졌다고 한다. 남대문 상가에서 한복점을 운영하는 송모씨는 “설을 맞아 한복이 잘 나가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적이 있었나 싶고 아련하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나마 서울역, 명동 등 도심에 위치한 남대문 시장은 관광객도 몰리는 편이라 나은 편에 속한다. 서울 종로5가의 광장시장은 설을 이틀 앞둔 것 치고는 비교적 한산한 분위기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칼국수, 파전, 등 먹거리 점포에 몰렸고, 장을 보러 온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 손님들의 대다수도 40~60대의 고령층으로 가족과 함께 장에 몰리던 과거 ‘설 대목’의 분위기는 느끼기 힘들었다.
광장시장에서 30년째 채소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고모씨는 ‘설 대목’이라는 말에 손사래부터 쳤다. 고씨는 “예전에는 사찰이나 식당에서 와서 대량으로 물건을 사가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런 광경도 보기 힘들다”면서 “설을 대비해 들여온 채소들이 다 팔리지 않을까 봐 걱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 5년 전부터 설 대목이 사라진 것 같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홈쇼핑이나 마트가 있는데 사람들이 재래시장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며 “이번 설에는 날씨만 좀 따뜻했으면 좋겠다”고 야채 박스들을 바라봤다.
고령의 할머니를 도와 과일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류모씨는 손님과 가격 흥정에 열심히였다. 사과 가격을 깎아달라는 손님의 말에 “지금은 비싸지 않은 게 없어요”라면서 기자에게 “경기가 나쁘다는데 재래시장을 찾는 손님들의 지갑은 더 얼어붙은 것 같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배와 사과는 지난해 잇따른 자연재해로 상당히 가격이 올랐다. 배는 평년보다 약 30%, 사과는 약 4.5%정도 각각 올랐다.
한편 이날 광장시장에서 판매된 설 관련 상품 가격은 ▲국거리용 한우(1++) 600g 3만원, ▲말린 대추 1봉지 8000원, ▲고사리 400그램 8000원, ▲도라지 400그램 8000원, ▲밤 8000원, ▲배 한알 2500~3000원, ▲사과 한알 2500원, ▲곶감 10개 8000원 등으로 대체로 일반 마트 대비 저렴한 수준이었다.
이날 남편과 함께 광장시장을 찾은 김모(61)씨는 “백화점과 마트는 가격이 얼마인지는 잘 모르지만, 광장시장은 물건이 확실히 좋다”면서 “단골로 온 지 수십년 째다. 이분들이 마트보다 좋은 물건 보는 안목이 더 좋지 않겠나”며 환하게 웃었다.
한전진 기자 ist1076@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