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구에서 카프리 마을로 가려면 푸니쿨라나 마을버스를 타던지 아니면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연락선을 타고 온 여행팀별로 가이드가 모여 푸니쿨라 탑승 순서를 뽑았다고 하는데, 우리는 4번이라고 했다. 하지만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서 버스를 타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 버스도 우리 차례가 될 때까지 무려 40여분을 기다려야 했다. 버스를 탈 때 보니 기다리던 사람들이 모두 없어진 것으로 봐선 우리가 맨 꼴찌였던 모양이다.
어찌됐거나 푸니쿨라를 자주 운행하지 않는 것은 버스운행을 통해서 일자리를 창출하는 효과가 크기 때문일 듯하다. 항구에서 절벽 위 마을로 올라가는 도로는 두 대의 버스가 서로 지나치기도 힘들만큼 좁은데다가 이리 돌고 저리 돌아가는 험난한 길이지만 기사의 운전솜씨는 가히 일품이다. 특히 버스가 코너를 돌 때 이탈리아말로 ‘지라레’라고 하는데 ‘돌아 돌아’라는 뜻이라고 했다.
카프리 시정촌의 중심 움베르토 1세 광장(Piazza Umberto I)에 도착했다. 1930년대에는 작은 광장이라는 의미로 라 피아제타(La Piazzetta)라고 했는데, 한편으로는 ‘세계의 작은 극장’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푸니쿨라가 도착하는 건물 바로 옆에 있는 시계탑은 성벽의 망루역할을 했던 모양이다.
시계탑 옆에 있는 교회는 17세기에 지어져 스테파노 성인에게 헌정된 산토 스테파노(Santo Stefano)교회이다. 교회 맞은편에 있던 대주교의 궁전은 지금 시청으로 사용된다. 움베르토 1세 광장 주변의 상점들은 단장하는 손길이 바쁜 모습이다. 긴 겨울 동안 장사를 접었다가 날이 풀리면서 관광객을 맞을 준비를 하는 모양새다. 프라다 등 명품가게들이 즐비하다. 카프리 섬에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영화배우들의 별장이 있어 출입이 잦고 따라서 파파라치들까지도 넘쳐난다고 한다.
교회 앞으로 난 골목길을 따라가다 보면 언덕 아래로 노랑색 건물들이 모여 있는데, 나폴리왕국의 조안나 1세 여왕의 비서 조코모 아르쿠치(Giacomo Arcucci)가 1363년 설립한 카르투지오(Carthusian) 수도원이다. 1553년 수도원이 복원되고 요새화됐는데, 목초지와 사냥 등의 권리를 두고 땅을 소유한 수도원과 섬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고 했다. 1656년 흑사병이 돌았을 때 수도사들은 수도원을 봉인했고, 주민들은 수도원 벽에 흑사병으로 죽은 사람의 시체를 던져 보복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수도원에서 조금 더 내려가다 보면 왼쪽 편으로 카르투지아(Carthusia)라는 이름의 향수 판매점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1380년 조안나 여왕이 카프리를 방문했을 때, 카르투지오 수도원의 신부가 섬의 꽃을 모아 꽃꽂이를 했는데, 3일 뒤 꽃은 시들어 버렸지만, 꽃을 담은 물에서 지금까지 몰랐던 향기를 발견하게 됐다고 한다. 신부는 이 물을 연금술사에게 가져갔고, 연금술사는 이 향기의 기원이 “가로필룸 실베스트레 카프레제(Garofilum silvestre caprese)”로 인한 것이라고 했다.
1948년 카르투지오 수도원은 옛날의 향수처방을 발견했고, 교황의 허락을 받아 토리노에서 온 화학자에게 작은 실험실을 맡겨 만들어낸 향수가 카르투지아(Carthusia)다. 향수의 제조방식은 옛날 수도원에서 하던 방식 그대로라고 한다. 남성용 향수는 몬테 솔라로 (Monte Solaro)에서 뽑은 로즈마리에서 원액을 얻고, 여성용 향수는 카프리의 야생 카네이션에서 얻은 원액을 기본으로 한다.
향수가게를 지나 조금 더 가면 아우구스투스 정원(Giardini di Augusto)이다. 20세기 초에 독일 사업가 프리드리히 알프레드 크룹(Friedrich Alfred Krupp)이 카프리에 저택을 짓기 위해 조성한 것으로 1918년까지는 크룹 정원(Krupp Gardens)이라고 부르던 것을 아우구스투스 정원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테라스에 제라늄 , 달리아, 빗자루 등의 꽃과 다양한 관상용 식물을 심어 조경했다. 아우구스투스 정원에서는 솔라로(Solaro)산, 마리나 피콜라(Marina Piccola), 등대바위라는 의미의 파라글리오니(Faraglioni) 등, 카프리 섬의 동쪽 해안을 두루 볼 수 있다.
아우구스투스 정원에서 동북쪽으로 바라보면 파라글리오니 쪽으로 흐르는 언덕에 주황색으로 칠한 건물이 있는데, 영화배우 소피아 로렌의 별장이라고 했다. 그 집의 테라스에 서면 거칠 것이 없는 바다가 펼쳐져 있을 것 같다. 파라글리오니는 그 옆에 섬처럼 보이는 작은 봉우리와 마주보며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는 듯하다.
그런가 하면 이탈리아 조각가 자코모 만주(Giacomo Manzu)가 소련대사관의 의뢰로 제작한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의 기념비가 일반에 공개되지 않은 위쪽 정원에 세워져 있다. 5m 높이의 흰색 대리석에 레닌의 옆모습이 새겨져 있다. 레닌은 1908년과 1910년 두 차례 카프리 섬을 방문했다.
카프리 시정촌을 잠시 둘러본 다음에 버스를 탔는데, 마리나 그랑데로 내려가지 않고 아나카프리 시정촌으로 건너간다. 여기에서부터 도로는 해안 절벽 위를 지나는데 가슴이 콩닥거릴 지경이다. 바로 도로 가에 쌓은 얇은 벽 아래는 그야말로 까마득한 낭떠러지이기 때문이다. 아나카프리에서는 특별하게 볼거리가 없었던 것 같다. 스쿠터를 빌려준다는 표지가 있는 주유소 앞 공터에서 버스를 돌렸다.
4시 55분 출항하는 배를 타고 나폴리로 향했다. 카프리에서 32㎞ 떨어진 나폴리까지는 배로 1시간 정도 걸린다. 소렌토에서 올 때 탄 배보다 훨씬 커서인지 많이 흔들리지 않아 좋았다. 나폴리 항에 가까워지는데 보니 아직 해가 지기 전임에도 불을 밝히면서 밤을 깨우고 있었다. 밤이 완전히 내리지 않은 탓인지 세계 3대 미항이라는 나폴리의 첫인상은 그저 실망이었다.
나폴리를 구경하는 일정은 전혀 없었다. 배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로마로 향한 것이 전부였다. 배가 부두에 도착해서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에 마주친 성곽, 그리고 항구 부근의 거리 풍경을 구경한 것이 전부다. 2018년 기준 96만2162명, 대도시권에 311만5320명이 살고 있어 이탈리아 내에서도 로마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자리를 두고 밀라노와 경쟁을 하며, 스스로를 나폴리탄(Neapolitan)이라고 부르는 나폴리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했다.
나폴리는 신석기 시대 무렵 인간이 거주했다. 기원전 2000년 무렵 그리스 사람들이 이주해왔다. 기원전 9세기경에는 그리스 로도스섬에서 온 뱃사람들이 메가라이드(Megaride) 섬에 파르테노프(Παρθενόπη)라는 작은 항구를 건설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이렌의 하나로 ‘순수한 눈’이라는 의미다.
나폴리는 기원전 7~6세기경 그리스의 식민지 백성이었던 쿠마에 사람들이 세운 것으로 보고 있다. 시칠리 섬에 있는 그리스 도시들의 영향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로마와 카르타고의 전쟁 때는 로마와 동맹을 맺었다. 삼나이트 전쟁 때 삼나이트가 나폴리를 일시 점령하였다가 결국 로마가 차지해서 식민지를 건설했다. 로마제국의 멸망 이후에는 동고트 왕국, 비잔티움 제국, 노르만족의 시칠리아, 호엔슈타우펜 왕가, 아라곤 왕국, 스페인, 오스트리아, 나폴리-부르봉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1266년 프랑스의 왕족 앙주의 샤를이 호웬슈타우펜 왕조를 무너뜨리고 첫 프랑스계 시칠리아 왕이 됐다. 그가 왕국의 수도를 나폴리로 천도한 것을 계기로 1282년까지는 시칠리아 왕국으로, 그 이후에는 나폴리 왕국의 일원으로 중요한 위치에 올랐다. 1814년 나폴레옹 전쟁의 수습을 위한 빈 회의 결과 나폴리는 양시칠리아 왕국의 수도가 됐다.
나폴리는 역사의 다양성만큼 볼거리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저 스쳐 지나가는 여행이 되고 말아 아쉬웠다. 다만 눈에 띄는 두어 가지를 짚어본다. 모로모로 항구의 선착장을 빠져나오면서 만난 카스텔 누오보(Castel Nuovo)는 새로운 성이라는 의미인데, 앙주 아성(Maschio Angioino, 마스키오 안조이노)이라고도 한다.
1266년 앙주의 샤를이 나폴리왕국을 차지해 카를로 1세로 즉위한 다음, 왕국의 수도를 시칠리아의 팔레르모에서 나폴리로 천도하기로 정했다. 카스텔 누오보는 이때 지은 새로운 궁전으로 프랑스 건축가들이 1279년 건설을 시작해 3년 뒤에 완성했다.
부두의 반대편에 있는 두 개의 탑 사이에 흰색 대리석으로 지은 커다란 성문이 있다. 1443년 나폴리를 점령한 아라곤의 알폰소왕의 개선문이다. 두 개의 아치형 탑을 쌓아 35m의 높이에 달한다. 아래쪽 아치는 네 개의 코린트 양식의 주두를 가진 기둥을 세웠고, 그 위에 콰드리거에 탄 알폰소왕의 개선행렬을 새겼다. 위의 아치에는 사자들과 알폰스의 힘을 묘사한 조각상들이 있는 4개의 벽감이 놓여있다.
카스텔 누오보 뒤로 멀리 보이는 보메로(Vomero) 언덕은 나폴리 만을 굽어보는 군사적 요지로 산트엘모 성(Castel Sant'Elmo)이 있다. 산트엘모라는 이름은 10세기에 이 장소에 있던 산트에라스모(Sant'Erasmo) 교회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앙주의 샤를이 통치하던 1275년의 문서에 의하면 벨포르테(Belforte)로 알려진 이 곳은 벽으로 둘러싸인 요새화된 거주지로 두 개의 탑으로 된 출입구가 있었다.
1456년의 지진으로 외부의 벽과 탑이 파괴됐다. 1537년 발렌시아 출신의 군 건축가 페드로 루이스 에스크리바(Pedro Luis Escriva)가 설계한 6각형 모형으로 재건을 시작해 1547년 공사를 마쳤다. 산트엘모 성 아래 하얀 건물은 산 마르티노 국립박물관인데, 1368년 조안나 1세 여왕 시절에 지은 산 마르티노 카루투지오 수도원(Certosa di San Martino) 건물이다.
6시 무렵 나폴리를 떠나 로마로 향했다. 로마로 향하는 버스에 탑승하고는 황당한 상황을 마주했다. 로마에서 올 때 앉았던 자리를 다른 일행이 차지하고 앉은 것이다. 그 사람은 카프리섬 선택 관광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폼페이에서 버스로 이동하면서 그 자리를 차지했던 모양이다. 어쩔 수 없이 비었음직한 자리에 앉았는데 그 자리에 앉았던 다른 일행이 자기 자리라며 비켜달라는 것이다. 결국은 맨 뒷자리로 밀려갔는데 생각할수록 황당하다.
보통은 아침에 앉은 자리는 그날 하루를 사용하는 것이 관행인데, 중간에 차지하고 앉아서 비켜줄 생각을 하지 않는 그 사람의 머릿속을 뒤집어 보고 싶었다. 다음날 아침식탁에서도 같은 식탁에 앉아야 했고, 로마시내의 벤츠관광에서도 같은 차를 타는 얄궂은 인연이 이어졌다. 결국 상대를 하지 않는 것으로 정리하고 말았다.
나폴리항구를 떠나면서 보니 주차장에 철거물을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구획이 있었다. 최근에 집시들과 난민들이 모여 살던 천막촌을 철거한 것이라고 했다. 이탈리아는 지금 지중해를 건너오는 난민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고 한다. 금요일 저녁인데도 고속도로 사정이 나쁘지 않아서 2시간 반 만에 로마로 돌아왔지만,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온 것은 10시가 넘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