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 수목극 ‘우아한 가’는 기대 밖의 작품이었다. 막을 올리기 전엔 성공을 점치는 이들이 드물었다. 하지만 방송이 시작되자 반전이 일어났다. 자극적이면서도 탄탄한 서사가 시청자를 이끈 것이다. 2.7%(닐슨코리아 기준, 이하 동일)로 출발선을 넘었던 이 작품은 최종회 시청률 8.5%를 기록하며 채널 최고 성적을 냈다.
재벌가의 가정사와 이면이라는 소재나 배경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하지만 전개가 될수록 비슷한 이야기를 다루는 드라마들과 다른 지점이 선명해졌다. 막힘 없는 전개와 캐릭터의 변주는 ‘우아한 가’를 통속극이 아닌, 특별한 드라마로 만들었다.
이 특별한 드라마의 중심엔 배우 배종옥이 있었다. 배종옥은 재벌가의 오너리스크전담팀 수장 한제국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언제나 냉철한 자세로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온갖 악행을 마다하지 않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그려낸 것이다.
드라마 종영 후 학동로 한 카페에서 배종옥을 만나 ‘우아한 가’와 한제국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모든 질문에 명쾌한 답을 내놓던 그는 이 자리에서 두 가지 작품을 언급했다. 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과 로맹 가리의 소설 ‘자기 앞의 생’이다.
배종옥은 대본상 남성이었던 한제국 역할을 제안받고 용기내 수락했다. 남자의 세계에 여성 캐릭터가 들어가는 설정이 신선했고, 한제국 같은 역할을 연기할 기회가 많지 않다는 점을 고려했다. 대사 톤과 이름 등을 바꾸자는 제작진의 제안은 거절했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새로운 한제국을 연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제국 역할을 하지 않았으면 후회했을 거예요. 마치고 나니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었다는 자신감과 성취감이 들어요. 한국 드라마에서 여성 배우가 한제국 같은 역할을 연기하긴 힘들잖아요. 캐릭터를 설정하면서도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좋을지 많이 고민했어요. 루즈 베이더 긴즈버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에서 주인공의 어머니가 ‘남을 설득할 땐 화내지 말고, 차분히 이야기하라’고 조언하는 장면이 있어요. 그 대사를 인상 깊게 기억하고 한제국 역할에 녹여냈죠. 대사의 중요한 부분에 포인트를 주되, 나머지 부분은 가볍게 날렸는데 그런 표현이 적중했다고 봐요.”
1985년 KBS 특채 탤런트로 시작해 올해로 35년 연기자 생활을 이어온 배종옥에게 한제국은 의미 있는 전환점으로 남았다. 매너리즘에 빠져 출구를 찾던 그에게 새로운 열정을 불러온 역할이기 때문이다. 배종옥은 “여전히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느껴서 고맙다”라고 말했다.
“예술가들은 오래 하면 새로움을 찾기 힘들잖아요. 프랑스의 작가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소설을 발표했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해요. 그런데 배우는 필명을 쓸 수도 없잖아요.(웃음) 30년 넘게 한 일로 새롭게 화제가 됐다는 것이 저에겐 의미가 있어요.”
배우로서 도전하고 싶은 부분도, 지향점도 분명하다. 배종옥은 ‘우아한 가’에서 얻은 자신감을 동력 삼아,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변화하며 나아가고 싶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우아하게 거침없이.
“일하지 않을 땐 극장 가서 혼자 영화 보는 게 재미이자 공부예요. 특히 외화를 볼 땐, 스토리도 중요하지만, 배우들이 어떻게 나이 들어가는지도 눈여겨봐요. 그리고 적절하게 나이 먹어가야겠다고 마음먹죠. 이제 저에게 남은 공부는 코미디 같아요. 젊었을 땐 진지한 게 좋았는데, 지금은 재미있는 게 좋네요.”
인세현 기자 inout@kukinews.com / 사진=제이와이드컴퍼니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