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서른다섯 번째 이야기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서른다섯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20-03-30 21:05:15

1918년 에스토니아가 독립하기 전까지는 탈린을 독일어로 레발(Reval) 그리고 러시아어로는 레벨(Ревель)이라고 불렀다. 고대의 라틴어 이름이던 레발리아(Revalia)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1154년에 지금의 북부 아프리카를 지배하던 알모라비드왕국의 지도제작자 무함마드 알 이드리시(Muhammad al-Idrisi)가 제작한 세계지도에는 콜론(قلون)이라고 표기돼있다.

옛 러시아 연대기에 콜리반(Колывань)이라고 적힌 고대 정착지 콜로반(Kolõvan)은 에스토니아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 칼렙(Kalev) 혹은 칼로바(Kalõva)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탈린 시내에서 조사된 고고학적 유적에서는 5000년 전 사람들이 정착한 흔적이 발견됐으며, 빗살무늬토기는 3000년 전의 것으로 밝혀졌다. 

1050년 무렵 탈린시의 중심에 있는 석회암 언덕 툼페아(Toompea, ‘성당언덕’이라는 뜻)에 최초의 요새가 세워졌다. 툼페아는 400×250m 크기의 직사각형의 지형으로 주변보다 약 20~30m 높다. 1219년 덴마크왕국이 점령해 지배했는데, 1285년 한자동맹의 일원이 됐다. 1346년 덴마크 왕은 지금의 탈린인 레발을 포함하는 에스토니아의 북부 지방을 튜턴기사단에게 넘겼다. 

중세까지 레발은 서부 및 북부 유럽과 러시아를 연결하는 무역로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당시 인구 약 8000명 이던 도시는 66개의 방어탑이 설치된 성벽으로 잘 강화된 요새였다. 종교개혁 시기에 탈린은 루터교로 개종했고, 1561년부터는 스웨덴이 지배했다. 북방전쟁(1700~1721)이 끝나고 러시아제국으로 지배권이 넘어갔지만, 1889년 자치구 지위가 폐지될 때까지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자율성이 유지됐다. 

1918년 2월 24일 독립이 선포되고 독일제국과 소련을 상대로 한 독립전쟁이 이어지는 동안 탈린은 독립 에스토니아의 수도였다. 1940년에 ‘붉은 군대’가 진주해 소련에 합병됐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1년부터 1944년까지 나치독일이 점유했다. 1944년 독일이 퇴각한 후 소련이 다시 점령했다. 그리고 에스토니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수도가 됐다. 1991년 8월 20일 탈린은 다시 독립 에스토니아의 수도가 됐다.

도시의 역사적 발전단계에 따라서 탈린은 크게 3구역으로 나뉜다. 도시의 중심부에 위치하는 툼페아(Toompea, 성당언덕) 지역은 덴마크왕국, 독일 기사단, 스웨덴과 러시아가 지배하는 동안 레발대 성당을 중심으로 귀족들이 주로 거주하는 별개의 도시였다. 오늘날에는 에스토니아 의회, 정부 및 외국 대사관 등이 있다.

한자동맹의 일원이던 시절 발전해온 구시가는 19세기에 이르도록 성당언덕과 행정적으로 통합되지 않은 ‘시민들의 도시’로 번영을 구가하던 중세 무역의 중심이었다. 구시가 남쪽으로 초승달 모양의 지역은 에스토니아 사람들이 정착해 살았다. 19세기 중반까지도 에스토니아 사람들은 발트 독일인들을 대체할 정도에 이르지 못했다. 

탈린에 도착해서 처음 간 곳은 카드리오르 궁전(Kadrioru Lossi)이다. 70ha(헥타르)에 달하는 에스토니아에서 가장 큰 왕궁 및 도시 공원이다. 1718년 러시아제국의 차르 페테르 1세의 명령에 따라 건설됐다. 18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공원양식의 요소들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공원 안에는 에스토니아 미술관, 카드리오르 미술관 및 미켈리 박물관 등 많은 박물관이 있고, 조각가 아만두스 하인리히 아담손(Amandus Heinrich Adamson), 작가 프리드리히 라인홀트 크로이츠발트(Friedrich Reinhold Kreutzwald), 예술가 얀 코르(Jaan Koort) 등의 동상들이 있다. 

북방전쟁이 한참이던 1714년 러시아제국의 차르 페테르 1세는 탈린의 행정구역인 라스마네(Lasnamäe) 지역에 있는 네덜란드 양식의 작은 건물을 포함한 100ac(에이커, 1ac=4046.86㎡) 규모의 장원을 사들였다. 에카테리나 I 알렉시브나(Екатери́на I Алексе́евна) 황후를 위한 궁전을 짓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로마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활동하던 이탈리아 건축가 니콜로 미케티(Niccolò Michetti)에게 궁전과 공원의 건설을 맡겼다. 1719년 착공된 궁전의 본관은 1721년에 완공됐으며 공원 전체는 1725년에 완성됐다.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차르와 황후는 여러 차례 현장을 방문했지만 페테르 1세는 궁전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1725년 죽음을 맞았다. 차르가 죽은 뒤에 재정문제로 공사가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했고, 에카테리나 1세 황후 역시 공사에 관심이 사라지고 말았다. 결국 1741년부터 1917년까지 궁전은 에스토니아 총독의 저택으로 사용됐다. 1828~1830년 사이에는 궁전과 정원에 대한 광범위한 복원작업이 이뤄졌다.

1919년 에스토니아 공화국의 독립 이후 궁전은 국가재산이 됐고, 1921년부터 에스토니아 미술관으로 사용됐다. 1934년부터는 에스토니아 대통령이 저택으로 사용했다. 1944년 소비에트 연방 시절 에스토니아 미술관으로 쓰였지만, 1991년 에스토니아가 독립할 때까지 방치돼 무너져갔다. 다행히 독립 후 스웨덴 정부의 지원으로 복원작업이 시작돼 2000년 다시 문을 열었다.

공원의 중심에는 카드리오르 궁전이 있고, 그 앞으로 하부 공원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궁전의 뒤편으로는 화원과 미라지 연못(Miraaži tiik)으로 조성된 상부 공원이 있었다. 상부와 하부 정원은 더 화려하게 장식할 계획이었다. 상부 정원은 3색 대리석을 쌓은 벽으로 다시 상단과 하단으로 나눠 화단과 분수대를 중심으로 한 연못으로 조성할 예정이었다.

상부 정원의 상단과 하단의 정원 사이는 3색 대리석으로 벽을 쌓고 중앙과 좌우에 계단을 뒀다. 20개의 분수대를 통해 물이 떨어지도록 계획된 벽면에 지금은 7개만 남았다. 중앙 계단의 꼭대기에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조각이 서있다. 상단의 미라지 연못은 흙으로 메워 위편에 있는 대통령관저의 장미정원으로 만들었다.

본관 건물은 중앙 홀 앞에 조성한 토스카나 발코니와 다양한 석고 장식으로 된 3개의 문이 특징이다. 중앙 홀 양쪽으로는 테라스로 이어지는 2개의 날개 건물이 연결된다. 본관건물을 정면에서 보면 3층이지만 후면에서 보면 2층이다. 궁전 입구에는 이탈리아의 대리석 조각가 안토니오 카노바(Antonio Canova)가 제작한 ‘밀로의 비너스(Aφροδίτη της Μήλου)’ 복제품이 있다. 

‘밀로의 비너스’는 1820년 4월 8일 그리스의 고대도시 밀로스 유적지에서 요르고스 켄트로타스(Yorgos Kentrotas)라는 농민이 발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각에 새겨진 비문에 따르면 기원전 130~100년 무렵 안디옥의 알렉산드로스가 제작한 것으로, 그리스의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묘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중앙 홀은 1721년 리가의 마티아스 사이트팅거(Matthias Seidtinger)가 가니메데스의 납치, 정의의 여신, 포세이돈, 다나에 등의 신화를 바탕으로 장식했다. 천정화는 1746년에 제작된 천정화는 탈린의 미술가 에른스트 빌헬름 론디서(Ernst Wilhelm Londicer)가 맡았다. 그는 오비드의 ‘변신’에 등장하는 사냥의 여신 다이아나와 사냥꾼 악타이온의 이야기를 묘사했다. 다이아나는 자신이 목욕하는 장면을 훔쳐 본 사냥꾼 악타이온에게 물을 뿌려 사슴으로 만들었는데, 악타이온의 사냥개들이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사냥감으로 알고 달려들어 갈기갈기 찢어버렸다는 신화다. 

카드리오르 궁전에서 나와 버스를 타러가는 길에 시민공원을 구경했다. 시민공원의 서쪽 끝에는 백조연못(Luigetiigi)이라는 작은 연못이 있고 그 가운데 정자가 서있다. 그 맞은편에 의사이자 작가인 프리드리히 라인홀트 크로이츠발트(Friedrich Reinhold Kreutzwald)의 좌상이 있다. 그는 에스토니아 민속학을 기반으로 한 많은 작품을 에스토니아어로 썼는데, 에스토니아에서 처음을 책을 낸 작가다.

‘칼렙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가진 그의 대표작인 장편 서사시 ‘칼레비포엑(Kalevipoeg)’은 국민 서사시로 꼽힌다. 모두 20편으로 구성된 ‘칼레비포엑(Kalevipoeg)’은 에스토니아 건국의 영웅 칼렙과 그의 아들 칼레비포엑의 삶을 노래했다. 거인 칼렙과 린다 사이에 태어난 유복자 칼레비포엑은 세 형제 가운데 막내다. 납치된 어머니 린다를 찾아 핀란드로 향하지만 어머니는 신들에 의해 돌로 변한 뒤였다. 

에스토니아로 돌아온 칼레비포엑은 돌 던지기 시합에서 형제들을 물리치고 왕이 된다. 요새를 지어 마을을 건설해 왕국을 안정시킨 다음 견문을 넓히기 위해 세상구경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악마의 시험을 물리치고 지옥에서 세 처녀를 구출한다. 그동안 에스토니아 왕국에서는 내란이 일어나 그를 따르는 부하들이 죽는다. 그는 동생 올레프에게 왕국의 통치권을 넘겨주고 숲으로 물러났다.

5시 반에는 탈린 구시가로 이동해 뚱뚱이 마가렛 성탑에 도착했다. 툼페아를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운 초기 성벽에 세워진 성탑으로 탈린 항구에서 가장 가까운 피카 거리(Pika tänava) 끝에 위치한다. 덴마크 왕, 에릭 클리핑(Erik V Klipping)의 어머니 마르그레 삼보(Margrete Sambor)는 에스토니아의 여왕이었는데, 1265년 툼페아에 요새를 건축하도록 명령했다. 툼페아 최초의 성벽은 바닥에서 1.5m 두께로 시작해서 5m 높이로 쌓았다. 이 성벽을 마르가렛 성벽(Margareti müüriks)이라고 부른다. 

포탑으로 건설된 뚱뚱이 마르가렛(Paks Margareeta)은 1518~1529년 사이에 장미정원 부지에 있던 정문을 보수하면서 지었다. 당시에는 로젠크란츠(Rosencrantz)라고 불렀는데, 지금의 이름은 1842년에 붙인 것이다. 바닥의 지름 25m의 원형 탑을 두께 6.5m에서 시작해서 4.4m에 이르도록 점차 줄여가며 지었다. 5층 높이의 탑은 3층에 대포를 그리고 4층에는 기관총대를 거치했으며, 5층에는 통로가 많은 개방형 포좌를 뒀다. 

대지의 경사와 지반의 하강으로 탑의 높이는 서쪽에서 16m 동쪽에서는 22m이다. 뚱뚱이 마르가렛에서 스톨팅탑(Stoltingi torn)에 이르는 3m 두께에 6.8m 높이의 측면 방어벽을 구축했다. 1683~1704년 사이에 재건됐으며, 1884년 탑의 남쪽으로 4층의 교도소 건물을 세웠다. 1978~1980년 사이에 해양 박물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보수를 했다.

오늘날 남아있는 탈린의 구시가와 툼페아를 에워싸고 있는 성벽은 탈린의 부총독으로 임명된 요하네스 칸(Johannes Canne)에 의해 1310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했다. ‘큰 해변 성문’ 이라는 의미의 수어 란나바라브(Suur Rannavärav)에서 시작해 이전의 마르가렛 성벽을 포함햐 지금의 성 마이클 수도원 인근을 거쳐 지금의 무리바헤 거리(Müürivahe tänavat), 하르주 거리(Harju tänava)를 지나 툼페아 성으로 이어졌다. 

성벽은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바꿔 너나바라바세(Nunnaväravasse)로 연결됐다. 칸 성벽(Kanne müüriks)이라고 부른 이 성벽은 2.3m의 두께에 6.5m의 높이로 중간에 에소헷(Echoget)이라고 하는 작은 형태의 매달린 탑이 설치돼있다. 

15세기 전반에 걸쳐 성벽은 광범위하게 보완돼 더 두껍고, 내벽은 옹벽으로 지어졌다. 1414년 무렵에는 27개의 방어탑이 세워졌다. 20세기에 접어들 때까지 탈린의 도시 성벽은 북유럽에서 가장 잘 보존된 것 가운데 하나였다. 전장 2.35km 길이의 성벽에는 28개의 중세 도시 벽탑과 46개의 성문이 있었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20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
오준엽 기자
이 기사 어떻게 생각하세요
  • 추천해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추천기사
많이 본 기사
오피니언
실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