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기사에서 지적한 문제의 심각성에 비해 출신고의 SNS 커뮤니티는 너무나도 조용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졸업생임에도 불구하고 노트북을 켜 출신고 커뮤니티에 글을 써 내려갔다. 글을 작성하면서도 믿기지 않아 인근 남중과 남고 교훈도 죄다 찾아봤다. 그 어느 곳에서도 교훈에 ‘남성’이라는 성별을 지칭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상’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사례를 찾으면 찾을수록 특정 성별이나 ‘어머니’를 언급한 교훈은 명백한 차별이라는 생각이 들어 착잡한 마음으로 글을 마무리했다. “저는 부디 제 후배들이 편견을 깨부수고, 생물학적 차이가 아닌 인간으로서 당당했으면 좋겠다는 마음 하나로 이 메시지를 보냅니다. 편견에 굴하지 말고 당당해지세요.”
내가 쓴 글은 삽시간에 퍼져 천 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다. 대부분 충격이라는 반응이었지만 ‘평소에 어떤 사고방식을 지녔으면 순결(純潔)을 그런 의미로 이해하냐’는 의견도 달렸다. 순결이라는 단어가 성적인 의미만 내포하는 것은 아니라 어느 정도 수긍했다. 그러나 남학교에서 순결을 교훈으로 내건 경우는 극소수였으며, 다수의 여학교에서만 이를 교훈으로 채택했기 때문에 충분히 오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근대주체와 식민지 규율권력」(1997, 문화과학사, 김진균)에서 일제강점기에 중시됐던 여성 교육에 대해 분석했는데, 당시 여성교육이 중요시된 이유는 제대로 된 아내와 며느리와 어머니의 역할 수행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여성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야 자식을 제대로 양육할 수 있고, 일제의 노동력에 보탬이 되기 때문이다. ‘차별’을 기반으로 한 일제강점기의 차별적 여성관은 여학교 교훈으로 잔존하고 있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는 학교를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라고 설명하며 학교 제도와 교육을 통해 노동자가 생겨난다고 주장했다. 또한, 교육자들은 본인의 믿음과 의지로 자발적으로 교육한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엔 학교에서 이뤄지는 교육과 규제가 자본주의적 주체로 만드는 이데올로기 장치에 의해 작동되고 있는 행위라는 것이다.
교훈은 학교의 이념이나 목표를 나타낸 표어다. 2021년의 학교와 알튀세르가 주장한 학교의 모습은 다를지 몰라도, 학교라는 곳이 학생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기관인 것은 변함없다. 그러나 이제는 좀 변해야 한다. 시대가 변하고, 학생들의 인권 감수성도 높아져 충분히 차별이라는 문제를 인식할 수 있다. 전통을 중시해서, 가톨릭 재단이라서, 동문들이 반대해서라는 이유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실질적으로 교육하고, 교육받는 구성원 간 합의가 있어야 한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강산만 변했다. 2031년에는 부디 교육자들의 성 인지 감수성이 지금보다는 높아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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