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직 생활을 하는 A(54세·남성)씨는 MMORPG(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 장르의 게임을 수년 째 플레이하고 있다. 평소 과묵하고 무뚝뚝한 성격의 A씨는 게임 속에선 다른 사람이 된다. 화려한 장비로 무장한 여성 캐릭터를 플레이하는 그는 수십 여 명의 멤버를 거느린 길드 마스터다. 주기적으로 이들과 친목 모임도 가질 만큼 끈끈한 우정을 자랑한다. 퇴근 뒤 길드원과 함께 떠나는 던전 공략은 A씨의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50대 중반의 남성 B씨는 우연히 유튜브에서 게임 ‘리그오브레전드’ 플레이 영상을 접했다. 평소 젊은 사람들의 취미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홀린 듯 게임을 시작했다. 재미를 느껴 챔피언과 스킨 등을 모조리 구매한 B씨는 좀처럼 실력이 늘지 않자 e스포츠 학원 취미반에 등록했다. 미숙한 플레이로 인해 나이가 한참 어린 동료 수강생들에게 지적을 받는 일이 허다하지만, 학원으로 향하는 B씨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하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표한 ‘2021 국내 게임이용자’ 실태조사에 따르면 50대의 게임 이용률은 57.1%에 달한다. 60~65세 게임 이용자는 37.3%를 기록했다. 더 이상 게임은 ‘애’들만의 전유물이 아닌 셈이다.
게임을 향한 중장년의 마음은 진심이다. 좋아하는 게임에는 적극적으로 지갑을 연다. 조사에 따르면 40대의 PC 게임 머니, 아이템 구입률은 73.2%로 전 연령대에서 제일 높다. 50대는 62.9%로 20대(58.1%)보다 높다. 60대 이상 게이머는 모바일 게임 아이템 구입률이 44.9%에 이른다.
즐기는 게임도 일부 장르에 국한되지 않는다. 50대 게이머의 30.8%가 FPS, TPS 등 슈팅 장르의 게임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레이싱 게임을 즐기는 이들도 23.9%로 그 수가 적지 않다.
총 쏘고 오토바이 타는 엄마
50대 이상 게이머의 증가는 여성 게이머 수의 증가와 맞물린다. 50대의 게임 이용률은 2018년 50.3%에서 2020년 56.8%로 크게 증가했는데, 여성 이용자 증가 폭(7.7%)이 남성(5.3%)보다 컸다. 특히 모바일 게임 이용률은 48.4%에서 57.1%로 증가했다. 2021년 여성 게임 이용률은 60.2%로, 남성(54.1%)과의 격차가 더 벌어졌다. 오락실과 PC방 등 과거 게임과의 접점이 부족했던 여성들이 비로소 본격적인 게임 활동에 나선 것이다.
김(53‧여성‧경남)씨는 ‘배틀그라운드’ 유저다.
이 게임은 서바이벌 FPS 장르다. 광활한 맵에 낙하산을 타고 떨어져 총과 장비를 수집하고, 이 과정에서 마주치는 다른 이용자들과 총격전을 벌여 최후의 생존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판단력과 고도의 순발력이 요구되는 터라 젊은 층에게도 진입장벽이 높은 게임이다. 쿠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김 씨는 “아무리 해도 어렵지만, 캐릭터를 조작해 맵을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좋더라”며 배틀그라운드의 매력을 짚었다.
김 씨는 유튜브 영상을 통해 배틀그라운드에 매료됐다. “하루는 ‘윤루트’의 배틀그라운드 영상을 봤는데 너무 재미있어 보이는 거에요. 마침 게임을 하고 있던 우리 애들한테 좀 가르쳐 달라고 했죠.”
자녀들의 도움을 받아 게임을 시작했지만 플레이는 녹록치 않았다.
“아들들이랑 같이 스쿼드(3~4인 파티)를 하는데 내가 못하니까 계속 팀이 죽는 거예요. 처음에는 애들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녔어요. 건물에 숨어 있는 적들이 튀어 나올까 봐요.”
“게임을 시작한지 얼마 안됐을 때였어요. 한 번은 문 뒤에서 사람이 갑자기 튀어나왔는데, 마우스를 집어 던지고 의자에서 펄쩍 뛰었어요. 그래도 게임을 계속 하다보니까 무뎌져서 이젠 강심장이 됐어요(웃음).”
“실력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그래도 총 쏘고 아이템 줍고 이런 것만 해도 스트레스가 풀리데요. 내가 게임이 아니면 어디서 오토바이를 운전해 보겠어요. 아이템 열심히 주워서 애들한테 주면 내 밥값은 다 하는 거죠.”
“요즘엔 기절한 동료를 업고 이동할 수 있는 기능이 새로 생겼잖아요. 내가 쓰러지면 애들이 업고 안전한데다가 옮길 수 있으니까 좋아요. 예전엔 자기장이 쫓아오니까 버리고 갔거든요.”
그는 쑥스럽다는 듯 웃으면서 “멀리 있는 적을 발견하는 것”이 자신의 특기라고 덧붙였다.
김씨는 아이템을 수집하러 갔다가 우연히 마주친 적을 쓰러트린 순간을 잊지 못한다.
“처음으로 누굴 쏴서 죽인 날 몇 번이나 장면을 돌려봤어요. 소리 지르면서 막 쐈는데 상대가 기절했더라고요. 그때 그렇게 기분이 좋았어요.” 김씨는 “심장이 그렇게 빨리 뛰어본 적은 오랜만”이라며 “그제야 애들이 이걸 왜 밤을 새워가며 했는지 알겠더라”며 웃었다.
김씨가 가장 좋아하는 요소는 ‘보급상자’다. 배틀그라운드는 일정 시간마다 공중에서 보급품이 내려온다. 상자 안에는 좋은 아이템이 가득하기 때문에 낙하지점은 대개 적들로 가득하다. 보급상자 방향으로 이동하는 건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하지만 김씨는 저 멀리서 홍염을 뿌리고 있는 보급상자가 보이면 주저 없이 달려간다.
“보급상자가 가까이 보이면 냅다 달려요. 거기 가면 잘 죽는 걸 알면서도 참을 수가 없어요. 어쩌다 운이 좋아서 아이템을 무사히 갖고 나오면 얼마나 재밌는지. 상자에서 나오는 아이템이 또 근사하잖아요.” 김씨는 보급상자를 뒤지는 동안에 뒷덜미로 흐르는 묘한 긴장감이 좋다고 설명했다.
엄마‧아빠는 왜 게임을 하게 됐을까
게임하던 자녀의 PC 전원을 꺼 버리고, 게임기를 숨기고 부수던 중장년층은 왜 게임을 하게 됐을까.
해외 연구에서 이들의 게임 이용 배경을 엿볼 수 있다.
미국의 마케팅 조사 기관 AARP는 2019년 미국 50세 이상 연령층의 게임 이용에 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50세 이상의 미국 게임 이용자는 2016년 4020만 명에서 2019년 5060만 명으로 약 26% 증가했다. 이 가운데 32%는 자신을 사회와 연결하기 위해 게임을 이용한다고 말했다. 타인과 온라인게임을 한다고 응답한 사람 중 약 70%는 지인이 아닌 모르는 사람들과 게임을 한다고 답했다. 또 온라인게임 이용자의 44%는 게임과 무관한 주제에 대해 토론하며 다른 플레이어들과 사회적 상호작용을 한다고 응답했다.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중장년층의 대인관계 또한 자연스레 위축됐다. 이웃‧사회와의 상호작용이 이를 해소할 수 있는데, 최근엔 게임이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는 효과적인 사회화 도구로써 활용되는 것으로 풀이된다.
뒤늦게 시작한 게임, 중장년과 사회 이어주는 가교
게임 문화 전반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도영임 교수 연구팀은 올해 초 국내 50~60대 중장년층 190명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설문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에 따르면 중장년층에서 게임을 누군가와 함께 플레이하는 사람이 게임을 혼자 플레이하는 사람, 그리고 게임을 하지 않는 사람보다 웰빙 지수와 사회적 지지 만족도가 높았다. 또 게임을 혼자 플레이하더라도 게임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보다 사회적 지지 만족도가 높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밖에도 중장년 게임 이용자들은 비 이용자들에 비해 ‘게임 활동을 통해 새롭고 다양한 활동과 도전을 경험해 볼 수 있다’, ‘가족이 같이 게임을 즐기면 관계에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다’와 같은 긍정적인 인식에 더 동의했다. 디지털 게임이 사회로부터 사람들을 고립시킨다는 일반적인 편견과는 상반되는 결과다.
도 교수는 쿠키뉴스와의 대화에서 “중년 게이머 대부분은 자녀와 게임 때문에 갈등을 겪은 경험이 있다”며 “이들은 게임을 하면서 자녀, 나아가 젊은 세대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는 경향을 보였다”고 말했다.
그는 “게임이 공정한 룰에 의해 진행이 되지 않나. 우리 워크숍을 찾은 어떤 분은 ‘젊은 친구들이 왜 불공정에 그토록 분노하는지 알게 됐다’고 말씀하시더라”며 “노인 분 가운데는 게임을 하다가 자신도 몰랐던 취향을 뒤늦게 확인하곤 깜짝 놀라곤 한다. 자녀가 좋아하는 게임을 나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워크숍을 찾았다가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아가기도 하고, ‘모두에게 재미있는 것’은 없다는 걸 깨닫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도 교수 연구팀의 이세연 박사는 “중년들이 게임을 찾는 배경에는 디지털 문화에 뒤처지기 싫은 욕구도 있다”면서 “중장년 게이머는 게임으로 새로운 문물을 배우고, 젊은층의 문화를 배우는 과정에서 삶의 활력을 느낀다. 워크숍에서 새로운 게임을 배운 할머니가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던 얼굴이 기억에 남는다”고 덧붙였다.
게임하는 엄마‧아빠, 더 늘어난다
콘진원 조사에 따르면 자녀와 게임을 즐긴다고 답한 학부모는 57.5%로 2017년(43.9%)부터 5년간 꾸준히 상승 중이다. 학부모 C(40‧여‧양천구)씨와 D씨(37‧여‧양천구)역시 초등학생 자녀들 때문에 게임을 시작했다.
D씨는 쿠키뉴스와 인터뷰에서 “어느 날 하루는 애가 게임을 혼자 하니까 재미가 없다고 하더라. 그래서 게임을 시작하게 된 게 여기까지 왔다”고 말했다. 게임에 대한 인식이 처음부터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어느 학부모처럼 “많이 해서 좋을 것 없는 것”, “애들이나 하는 것” 정도로 게임을 바라봤다고. 하지만 게임을 시작하면서 이런 인식은 점차 바뀌었다. C씨와 D씨는 “같이 게임을 하면서 우리 아이에 대해 더욱 잘 알게 됐다”고 입을 모았다.
자녀와 함께 ‘브롤스타즈’를 즐기는 C씨는 “아이와 공통 대화 주제가 생겨서 더 많은 얘기를 주고받게 됐다”며 “‘내 아이는 이런 종류의 게임을 좋아하는 성향이구나’ 하는 걸 알게 됐다. 난 재밌는데 아이는 싫어하는 게임도 있더라”고 말했다. C씨는 “내가 게임에 대해 알게 되니 게임을 갑자기 중단시키는 일이 줄었다. 자연히 아이와 얼굴을 붉히는 일도 사라졌다”며 게임을 시작한 뒤 찾아온 변화를 털어놨다.
‘쿠키런 : 오븐브레이크’를 즐기는 D씨는 “같이 게임에 대해 얘기하니까 아이가 더 신이 나서 설명하고 대화하더라. 게임하는 태도에 대해 많이 얘기하는 편인데 그걸 친구랑 할 때도 지키는 모습이 뿌듯했다”며 흡족해했다.
나아가 D씨는 자녀와 게임을 하면서 새로운 ‘나’를 발견했다고 덧붙였다. “쿠키런은 펫을 얻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단 점프 타이밍은 내가 생각해도 기가 막힌다”며 신을 낸 D씨는 “나도 스피드를 즐기는 스타일인 걸 게임을 통해 알게 됐다”며 “직장 동료들과도 점심에 짬을 내 게임을 한다”고 말했다.
도 교수는 “아이 입장에서는 부모가 게임에 대해서 알고, 좋아하는 것이 축복으로 다가올 수 있다”며 “무조건 반대만 하면 대화가 자연스레 닫힌다. 이해를 받지 못하는 쪽에선 점점 자신의 이야기를 숨기게 된다. 부모에게 터놓기보다 또래나, 공통의 관심사를 갖고 있는 사람과 가까워지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자녀가 좋아하는 게임을 함께 하면서 공통의 관심사를 나누면 그들을 조금 더 이해하기 쉬워진다. 게임 내의 불편한 상황들이나 문제들을 해결하는 등 올바른 게임사용을 지도하기도 편하다”며 “인물과 사회의 특징이 잘 드러난 ‘심즈’와 같은 게임을 부모와 자녀가 함께하면 취향이나 성격을 잘 알 수 있다는 기존 연구 결과도 있다. 게임을 잘 선택하면 아이와 더 깊은 소통을 나눌 수 있다”고 강조했다.
게임은 작은 사회, 부정적 편견 버려야
도 교수는 ‘쾌락’이라는 단편적인 이미지에 매몰돼 게임이 가진 다양한 모습을 보지 못해선 안 된다고 호소했다.“미디어에서 게임을 찰나의 쾌락 등을 얻는 도구로만 비췄던 부분들이 많아요. 하지만 인간의 즐거움엔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어요. 지루한 과정을 인내심으로 이겨내고 결과물을 얻어냈을 때의 성취감, 게임 내 사회 속에서 맺는 깊은 인간관계 등도 하나의 즐거움이잖아요. 게임 행위가 가치 있다고 인식하는 게 중요해요.”
“게임 속에선 타인과 상호작용하면서 공동의 목표를 나누고, 계속해서 도전해 끝내 성취한 경험을 공유하고 확산할 수 있어요.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가져야 할 꼭 필요한 요소들이죠. 부정적 인식이 과도해 잊혀졌을 뿐이에요. 어떤 각도로 렌즈를 들이대느냐에 따라 게임의 모습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어요.”
문대찬 기자 mdc0504@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