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생.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에서 태어나 현재 하월곡동 88번지에서 26년 째 '건강한 약국' 약사로 일하고 있다. '하월곡동 88번지'는 소위 '미아리텍사스촌'으로 불리던 집창촌이다. 이 약사는 이 곳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약사 이모'로 불린다. 그들을 위해 '사회복지사' 자격도 취득하여 주민 상담, 지역 후원사업 등을 전개하고 있다. "아주 조금이라도 사회에 보탬이 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쿠키칼럼]
'약사 이모' 이미선입니다.
서울시 성북구 하월곡동 88번지달빛 아래 맑은 계곡, 북한산에서 흐르기 시작한 정릉천이 감싸고 도는 작은 마을지금은 사라져가고 있는 행정 지번이고,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나의 고향이다. 꽃피는 산골은 물론 아니고 복숭아꽃 살구꽃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지만, 나의 빛나고 환한 추억 열매는 이곳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나는 ‘건강한 약국’ 약사로서, ‘건강한 상담센터’ 상담사로서 26년 동안 이곳에서 삶의 길을 아주 잘 걸어가고 있다.다양한 이름으로, 다양한 열매로, 많은 것을 만들고 있다. 그 많은 열매에 얽힌 이야기를 하나하나 펼쳐 보이려고 한다.
내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이곳이 ‘ 신월곡 1구역’이라는 이름 아래 재개발이 시작되었다. ‘재개발’이라는 단어는 말 그대로 다시 개발하여 살기 좋은 지역을 만든다는 뜻이리라. 재개발 이야기가 나온 지는 10여 년이 넘었고 그리 머지않은 시간 뒤에 재개발의 굴착기에 이곳은 밀릴 것이고, 많은 삶들이 바리바리 짐을 지고 정처 없이 살 곳을 찾아 헤매게 될 것이다.
하월곡동 88번지에서 살고 있거나, 성매매 집창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휘몰아치는 바다 위의 작은 뗏목처럼 지친 삶의 불안함을 호소하고 있다. 여든이 훨씬 넘으신 강화댁 할머니는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다니면서 이 동네의 폐지와 빈 병을 주워서 삶의 가닥을 이어가고 있다. 홀몸 어르신이 분명한데도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선정에서 번번이 탈락하였다.
주민등록상 함께 되어있는 딸의 존재와 그 딸의 수입 때문이었다. 연락처도 모르고 인연을 끊고 산 지 십 년이 넘은 모녀 관계가 커다란 바윗덩어리로 할머니의 삶을 막고 있었다. 단 한 푼의 생활비도 받아본 적이 없다는 강화댁 할머니는 딸내미 이야기를 할 때마다목청을 높였고, 온갖 욕을 쏟아냈다. 차마 듣기에 너무 민망한 욕들…정말 욕들의 향연이었다.
차분히 말씀 하시고, 남의 이야기도 잘 들어주시던 할머니의 너무도 다른 모습이 생경하기도 했지만 그 분노와 배신의 깊이를 그 누가 짐작할 수 있을까. 강화댁 할머니는 매주 금요일 우리 약국에서 나누어 드리는 반찬으로 3~4일의 반찬을 해결하신다. 빨간 뚜껑의 동그란 반찬 통에는 맛깔난 다섯 가지의 반찬이 담겨있고, 매주 금요일 반찬 천사들이 오셔서 이쁜 날개 아래 숨겨온 반찬 통 12개를 내려놓고 빈 반찬 통을 휙 수거해간다.
작년 2월부터 ‘반찬 천사의 날갯짓’은 하월곡동 88번지를 행복하게 만들고 있다. 반찬 천사의 날갯짓은 완벽한 매직이다. 더운 여름날에는 정성과 인삼 가득한 삼계탕과 초록 듬뿍 열무김치로. 둥근 달님이 세상을 밝히는 대보름날에는 고소한 무나물과 봄 향기 가득한 취나물로 시리고 아픈 가슴을 어루만지고 위로해주었다.
지난 대보름날 홀로 사시는 박씨 할아버지께서 “우리 할멈 저세상 가고 이렇게 맛있는 나물은 처음이었어” “어쩜 이리 잘 볶았을까, 부들부들하게, 질기지 않게, 고소하게”...워낙 나물을 좋아해서 시장에서 종종 사 먹곤 하는데 너무 질겨서 먹기 힘들 때가 많았노라고 감사해서 인사라도 하고 싶지만 쑥스럽다고 하시면서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만 원짜리 두 장을 꺼내어 약국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셨다.
두세 달에 한 번씩 물김치가 나오는 날이 있다. 매주 달라지는 반찬의 메뉴는 미리 알 수 없지만, 물김치가 배달된 날은 기분이 정말 좋다. 물김치를 너무 좋아하는 김씨 할아버지가 기뻐 웃으실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기 때문이다. 일 년 내내 물김치만 먹고 살면 좋겠다고 말씀하시곤 하는 김씨 할아버님께서 지난 추석 배춧값이 너무 올라서 걱정이라고 말끝을 흐리셨다.
재개발에 관련된 현수막이 여기저기 붙고 동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재개발에 관한 이야기들이 오고 가기 시작하면서 어르신들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매일 먹는 맛있는 반찬들은 이제 누가 해주냐고봄이면 약국 앞 화단에 치자꽃 향기가 가득하면 강화댁 할머님은 십팔 세 소녀가 되어 샤랄랄라하신다.
여름이면 연초록의 풍선을 닮은 열매가 대롱대롱 달려 땡그랑 땡그랑 종소리 울릴 것 같은 풍선초, 연약한 넝쿨로 무언가를 감고 올라가 붉은 꽃을 피워 올려 자신의 존재감을 온몸으로 드러내는 유홍초도 해마다 건강한 화단의 한 귀퉁이를 장식했다. 이런저런 이름 모를 꼬물이 다육이 화분들도 약국의 한 외벽을 차지하고 있다.
'미아리텍사스' 성매매 집창촌 시베리아 벌판 같은 골목에서 한겨울을 버텨낸 라일락 나무 두 그루가 봄이 오면 연보라색 꽃을 피워 깊은 향기로 자신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각인시킨다. 웃음도 없고, 아이들도 보기 힘든 이 골목에는 늘 어둠이 가득하다. 유난히 쓸쓸한 이 골목에 사는 ‘건강한 약국’ 초록이들은 동네 사람들의 애정을 듬뿍 받으면서 잘 자라고 있다.
사랑받는 아이들의 초록은 그 색의 농도가 진하고 바다의 윤슬처럼 빛나고 있다. 강화댁 할머님은 건강한 초록이들의 왕팬이시다. 화단 앞을 왔다 갔다 하시면서 아이들에게 일일이 말을 걸고, 초록이들이 하는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끝을 받아주신다. 정말 놀라운 그녀의 능력이다.
코로나 유행 이후에 그녀의 일상은 더 피폐해져 갔다. 소일거리 삼아 가던 노인복지관도 문을 닫고 폐지가격은 끝 간데없이 떨어지고 무겁고 힘든 삶이 도저히 나아질 기미가 없다고,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다면서 끝없는 한숨 소리로 공간을 가득 메우는 날들이 많아지셨다. 매일 매일 물으신다. 재개발되면 약사 이모는 어디로 떠날거냐고.
약사님이라는 호칭보다 '약사 이모'라는 호칭으로 더 많이 불리는 나는 대한민국의 유일한 ‘약사 이모’ 하하하. 나는 ‘약사 이모’라는 내 별호가 참 좋다. 이모는 엄마의 형제들을 부르는 호칭이다. 엄마처럼 야단칠 수도 있고, 엄마처럼 품어줄 수도 있다.
다이어트약을 너무 긴 시간 먹고 있는 친구에게 한 달 내내 지겹게 잔소리를 했다. 마치 이모처럼…어제는 드디어 그 친구가 다이어트약을 반으로 줄였다. 환성을 질렀고 정말 감사했다. 심장 기능이 매우 약한 그녀에게 중추신경을 자극하는 식욕억제제는 온몸을 망가뜨리는 독에 가깝다.
하월곡동 88번지에서 약국을 하면서, 참으로 많은 눈물과 아픔과 행복을 만난다. 이글을 만나는 독자들과 그 모든 것을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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