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고의 화가 박수근(1914~1965)은 일제강점기 강원도 양구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그는 양구보통학교 시절부터 뛰어난 그림 실력을 보인다. 수근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나 조선미전에 입선, 작가로서의 꿈을 키운다.
박수근의 아버지는 양구를 떠나 강원도 김화군 금성읍내에 정착하여 시계포를 열어 생계를 꾸리는데 그 시계포집 윗집이 금성의 부자 김복순(1922~1979)의 집이었다. 김복순은 춘천여고를 나온 신여성으로 춘천의 의사 집안과 혼담이 오가고 있었다.
그런데 김복순에 반한 아랫집 청년 박수근이 상사병에 걸려 드러눕고 만다. 박수근 아버지는 이런 아들을 위해 윗집에 통사정을 하나 김복순의 아버지는 요지부동이다. 하지만 김복순은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맺어준 남자와의 결혼이 싫었던 차에 박수근의 부드러운 태도와 수려한 용모에 반해 마음이 움직인다.
이들은 결혼했다. 두 사람은 금성감리교회에 다니며 오붓한 가정을 꾸리나 남북이 갈리면서 금성은 공산 치하가 됐다. 부부는 조선민주당 조만식 선생을 지지하고 각기 면과 군 대의원이 된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하고 부부는 쫓기게 된다. 산속 깊이 숨어 피난 생활을 하던 부부는 김복순의 권유로 우선 박수근을 남으로 탈출 시킨다. 그리고 김복순도 아이들을 데리고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5회>
화가 박수근의 아내 김복순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산 넘고 물 건너 탈출하면서 검정치마는 여기저기 찢겼고 무명저고리는 헤졌다. 머리를 감지 못해 머릿니가 말할 수 없이 많았다. 미친년처럼 보일까 매무시를 가다듬어도 표가 나지 않았다.
김복순은 6·25전쟁 통에 남편을 찾아 북한 점령 지역 강원도 김화군 금성면소재지 집을 탈출해 간신히 피난 차에 오를 수 있었다. 1951년 10월 하순 금성읍내(1914년까지 금성군 읍치였다가 그해 김화군에 흡수됐다) 집을 버리고 목숨을 건 탈출에 성공한 것이다.
그녀는 금성읍을 가로지르는 남대천을 건너 UN군 품에 안겼고 남편의 고향인 강원도 양구 읍내를 거쳐 춘천피난민수용소를 거쳐 청량리역에 닿을 수 있었다.
그때 자신보다 먼저 탈출한 남편 박수근이 서울 창신동 친정 동생 집에 무사히 도착해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들었다. 청량리역에서 피난민 호송 트럭에 실린 이들은 ‘안양피난민수용소’로 가고 있었다.
“경찰 아저씨, 저를 내려 주실 수 없습니까? 남편이 동대문 밖 창신동에 살아요. 제발 부탁합니다.”
김복순은 간절히 호소했다. 품에 딸 인숙(당시 7세)과 둘째 아들 성남(4)을 안고서였다. 박수근 김복순 부부는 1948년 첫아들 성소(당시 6세)를 뇌염으로 잃었고 전쟁 발발 후 피난 다니면서 셋째 성인(당시 2세)도 잃었다. 때문에 어떻게든 두 아이들만이라도 살려야 했다.
“아주머니 이북 피난민이 수용소에 가지 않고 독자적으로 벗어나면 피난증을 못 받습니다. 당연히 배급표도 주지 않습니다. 곧 겨울이 닥치는데 두 아이들 데리고 어찌 살려고 그러십니까. 그냥 안양피난민수용소까지 가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얘기가 오갈 때 트럭은 동대문 안으로 접어들어 종로 길을 가고 있었다.
‘그래 성남 아버지와 동생들이 살아 있는지 어쩐지 내 눈으로 확인 못했으니 일단 수용소로 가서 피난증과 배급표를 받고 난 다음 성남 아버지를 찾아보자.’
김복순은 그렇게 마음먹었다.
안양피난민수용소는 안양역 뒤편에 있었다. 폭격 맞은 학교와 그 일대였다. 안양도 금성읍내만큼이나 파괴되어 있었다. 안양역을 통과하는 군용 열차가 수시로 오갔고 열차 안에서 학도병인 듯한 청년들이 군가를 목청껏 불렀다.
1951년 7월 31일 기준 경기도의 피난민은 125만 여명이었다. 이중 박수근 가정처럼 이북 피난민은 경기도에만 10만 여명에 달했다. 피난민을 감당할 수 없었던 전시 정부는 수용소마다 천막 몇 개와 구호양곡 며칠 분을 던져주고 나 몰라라 했다.
때문에 안양 여주 이천 용인 오산 등 피난민과 전재민이 몰린 곳에는 유랑 난민들로 사회가 극도로 무질서했다.
‘…가마니 한 겹으로 겨우 땅 바닥을 면한 피난민들은 그간의 고된 생활에 모두들 창백하다. 오랫동안의 시달림으로 모든 것에 마비된 그들은 전국(戰國)에 대해서도 그리 큰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들은 지난 3월에 굶어 죽은 18명의 동포와 함께 했던 사람들로 다가오는 아사(餓死)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다….’(1951년 5월 8일자 조선일보)
이 기사는 화성군 발안 피난민수용소를 취재한 기자의 보도문이다. 당시 경기도에는 안양을 포함하여 14개 수용소가 있었다.
김복순은 이 열악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든 아이들과 살아남겠다는 의지로 굶주림, 추위, 더위, 노동을 견뎌야 했다. 전쟁 전 금성 집에서 남편 박수근과 함께 밥상머리에 둘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던 시절은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에 떨었다.
10월 말이라고 하지만 밤이면 추웠다. 김복순은 미리 와 있던 피난민들에게 사정해서 배급 쌀과 솥을 얻어 학교 운동장 한 가운데 급조한 화로에 밥을 안쳤다. 반찬은 소금뿐이었다. 부서진 학교 건물과 얼기설기 세운 움막엔 피난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이들의 칭얼거림은 신음처럼 밤하늘에 퍼졌다.
아이들과 허기를 면한 김복순은 안양에서 영등포까지 걸어간 후 도강만 하면 남편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현실은 이슬 피해 잠 잘 곳이 없었다. 자신이야 한대 잠을 잔다 쳐도 인숙과 성남이마저 흙바닥에 재울 순 없었다. 그는 피난민 중 혹 아는 사람이 없을까 피난민 사이를 헤집고 돌아다녔다.
“김 선생님…”
뒤에서 누군가가 김복순을 불렀다. 금성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그녀는 단박에 자신을 부르는 소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뒤를 돌아보자 놀랍게도 금성보통학교 동창 조인태(가명)였다.
조인태는 놀라 동그랗게 뜬 눈으로 반가움과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금성 읍내 부잣집 딸이자 조선미술대전에 입선한 유명 작가의 아내, 또 학교 교사였던 동창 김복순은 간데없고 헤진 머리를 하고 있는 심난한 아주머니가 되어 있었다.
김복순은 조인태에게 체면 불구하고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고 그가 사는 움막에 두 자녀를 재워줄 것을 부탁했다. 움막이라야 방 한 칸에 부엌뿐이었다. 조인태는 부인의 양해를 얻어 아이 둘을 자신의 가족 틈에 끼어 자게 했다. 김복순은 체면 불구하고 동창의 움막 부엌에다 가마니를 깔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김복순의 더부살이는 며칠가지 못했다.
“당신 저 여자와 도대체 무슨 관계 길래 몇날 며칠 거두는 거예요. 당장 우리 새끼들 먹이기도 힘들 판에 생판 모르는 여자와 아이들까지 거둔단 말이에요? 이 전쟁 통에?”
조인태의 아내가 앙칼진 목소리로 따졌다. <이어짐>
전정희 편집위원 lakaja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