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독한 설날'이 다가온다... 화마 덮친 구룡마을 [르포]

'혹독한 설날'이 다가온다... 화마 덮친 구룡마을 [르포]

3시간여 만에 820여평 잿더미로 변해
"불 나 도망가는 것도 하루이틀" 울분

기사승인 2023-01-20 20:01:52
20일 오전 화재가 발생한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4구역 일대. 사진 = 임형택 기자 

설 연휴를 하루 앞둔 20일 낮 12시께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서울의 마지막 판자촌인 이곳에서 오전 6시27분 화재가 발생했다. 대모산과 인접한, 경사진 4구역에서 불은 시작됐다. 3시간 가까이 타올랐다. 2700㎡(약 820평)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오전 11시46분 불길이 완전히 잡혔다. 할일을 마친 소방관들이 숯검댕이칠을 한 듯한 얼굴을 한 채 삼삼오오 화재현장을 빠져나왔다. 화재현장으로 가는 경사진 도로에는 소방호스가 전선줄처럼 깔렸다. 탄광촌 개울처럼 시커먼 물줄기 소방호스를 따라 흘렀다. 기온은 영상 1도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바람이 거세 체감온도는 영하 3~4도는 됐다. 매캐한 연기가 좁은 골목길을 떠나지 않았다.   

화재현장에서 육안으로 발화점을 찾기는 어려웠다. 불길은 땅 위의 모든 것을 공평하게 태웠다. 판잣집을 지탱한 철골과 반쯤 녹은 냉장고가 반나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었다. 패총처럼 수북히 쌓인 연탄과 그을린 LPG가스통들을 보자니 이날 화재가 이 정도 선에서 그친 게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20일 오전 화재가 발생한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4구역에 타다만 연탄이 나뒹굴어 있다. 사진 = 임형택 기자 


오후 2시께 화재가 완전히 진압됐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대피해 있던 주민들이 마을회관으로 모여들었다. 연탄난로 앞에 모여앉아 추위에 얼어붙은 몸을 녹이며 얘기를 나눴다. 다들 심란한 표정이서 말 붙이기가 어려웠다. 60대 여성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음식과 담요 등을 부탁했다.

마을회관 바깥에서 한숨을 내쉬던 또 다른 60대 여성은 "빨리 재개발을 해야지 주민들을 이대로 방치할 것이냐"며 서울시를 비판했다. 그는 "여기 노인네들이 대부분 연탄 때고 산다. 다들 몸이 아프다. 불 나서 도망가는 것도 하루이틀이다. 설 앞두고 이게 뭐냐. 서울시는 우리보고 임대아파트 가서 살라는데, 계약 끝나면 어찌될지 누가 아나. 주민들은 좁아도 지금 집이 자기 집이다. 나가라면 최소한 반값 아파트라도 하나 줘야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구룡마을에서 40년 가까이 살았다는 70대 여성은 "오늘 아침에 불이 났지만 마침 일 나가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불났다고 하니까 금방 피할 수 있었다"며 "의용소방대 김흥기씨가 역할이 컸다. 그 분이 집집마다 문 두드리고 대피하라고 소리쳐서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20일 오전 화재가 발생한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4구역에서 소방관들이 잔불을 정리하고 있다. 사진 = 임형택 기자


구룡마을에는 화마가 달갑지 않은 단골손님이다. 최근 10년 새 이번 화재까지 큰 불만 4번이 났다. 작은 화재는 일상이다. 골목 어귀마다 SH서울주택공사에서 화재예방을 위한 안내문을 붙여놓고 소화기를 배치해놓았지만 화재는 보란 듯이 일어났다. 

나무 합판과 슬레이트로 지어진 판잣집은 화재에 취약하다. 하지만 추위가 두려운 주민들은 겨울이면 비닐과 스티로폼, 그리고 '떡솜'으로 불리는 솜뭉치를 단열재로 두른다. 불똥 한번 튀면 순식간에 불이 번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소방 관계자는 화재원인을 특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주민들 사이에서는 몸이 불편한 4구역 주민 A씨가 연탄을 깨다 튄 불똥이 스티로폼에 닿으면서 불이 난 게 아니냐는 소문이 정설처럼 퍼져있었다. 

장바구니에 생필품을 가득 채운 채 화재현장에서 빠져나오던 60대 여성은 심경을 묻는 기자에게 헛웃음을 지으며 "이번에도 일복이 터졌다"고 말했다.  

20일 오전 화재가 발생한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4구역에서 주민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 = 임형택 기자


화재를 목격하고 119에 신고를 했다는 이현규(79) 할아버지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긴박했던 순간을 하나하나 되짚었다. 소방당국 발표와 다소 차이는 있지만 참고할 만했다.

"(오전)6시에 깨서 6시20분에 밖을 보니 환했다. 쓰레기를 태우는 게 아닌가 나와서 봤더니 불이 났더라. 6시25분에 마침 지나가던 사람이 있어서 전화기를 빌려 119에 선고했다. 마을 입구에 주둔하는 소방차 1대가 바로 왔고, 5대가 추가됐다. 불난 곳까지 도로가 좁아 차가 들어가기 소화기를 썼지만 불이 안 꺼졌다. 처음에는 바람이 위에서 불어와 아래로 번졌고, 그 다음에는 아래에서 (바람이)불어 위쪽 대모산 쪽으로 번졌다. 2시간 만에 헬기가 와서 물을 뿌리면서 불길이 잡혔다."

이 할아버지는 언론이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미리 단정 짓지 말라고 했다. 거주자 수가 들쭉날쭉 한데다 몸이 불편한 노인들이 많이 사는 까닭에 미처 대피하지 못한 사람이 잿더미에 파묻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실제로 2014년 11월 화재 때 뒤늦게 희생자가 발견됐다. 

이날 불로 4구역 내 60가구가 불에 탔다. 500여명이 대피했고, 이중 62명은 보금자리를 잃은 이재민이 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해외순방 중 구룡마을 주민들의 안위를 염려했다. 여야 지도부는 정쟁을 잠시 멈추고 화재현장을 찾아 주민들을 위로했다. 기업과 단체에서 구호물품이 답지하고 있다. 이재민들은 당장 강남구청의 긴급구호조치로 관내 호텔 4곳에 머문다. 온 나라의 관심이 집중됐다. 하지만 이들이 호텔문을 걸어나간 뒤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근본적으로 고민하는 이들은 적은 듯하다. 7㎡(2평) 남짓한 무허가 판잣집이 삶의 마지막 거처였을 지도 모를 이들에게 혹독한 설날이 다가오고 있다.  
 
손대선 기자 sds1105@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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