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세브란스의학교 1회 졸업생 의사 신창희(1877년생) 선생이 동몽골 퉁랴오에서 죽었다. 그는 동아래 동서 백범 김구와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만주 일대로 들어와 독립투쟁을 벌였다. 임시정부 군의이기도 했다.
신창희는 상해에 가기 전 평북 의주와 중국 단둥에서 의원을 개업, 독립군의 도항을 돕고 임시정부 군자금을 대기도 했다.
<하편>
백범 김구가 3․1만세 사건 직후 의주를 거쳐 도항, 상해로 피신했다. 김구의 손위 동서 신창희가 결정적 역할을 했을것으로 보인다. 상해 임시정부에 안착한 백범은 곧 경무국장이 됐고, 신창희는 임시정부 군의로 활동했다는 기록이 일제 하얼빈영사관 문건에 나온다.
또한 신창희는 상해에 머물면서 대한적십자회 상의원(독립신문 1922년 3월 1일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리고 신한청년단을 통해 외교 활동을 통한 독립운동을 주창하던 그는 이 청년단이 공산주의 그룹에 우호적 태도를 취하자 동서 김구 등과 탈당했다. 손아래 동서였던 김구가 신창희보다 한 살 많았으며 둘은 동지적 관계였다.
그러나 1920년대 임시정부는 일제의 강력한 탄압으로 생계조차 힘들었다. 흩어져 각자도생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김구 부인 최준례, 즉 신창희의 처형은 상해에서 가난과 산후 후유증으로 사망(1924년)했다.
신창희는 일경 체포 용의선상에 올라 신분을 속여 가며 살았다. 동포교회 동몽골교회가 도움을 주었다. 신창희는 ‘떠도는 동포들을 치료해 준’ 의사였으나 ‘다년간의 해외 생활의 궁핍함 등으로 폐렴에 걸려 회복치 못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의는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환자와 교회 사람들이 80원을 모아 그의 시신을 몽고 사막에 묻었다.
"이혼한 전처, 조선인 헌병보조원과 살림을 차리다니..." 동서지간 신창희와 김구 처가의 '흑역사'
‘백범 일지’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백범의 한탄이다.
‘처형은 평산 등지에서 헌병보조원의 처인지 첩인지 되어 살고, 장모도 동거한다는 풍설만 듣고 있다가…어머니와 아내가 경성으로 와서 내 재판을 본다고 오던 도중 평산 처형 집에 딸화경을 두고 오신다 한다.…아내는 언니가 헌병 첩 질한다는 말을 들은 후 절연했으나 내가 이 지경(1911년 신민회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 투옥됨)이 되매 부득이 (처형에게 딸을 맡기러) 갔을 것이다…내가 주장하던 것들(학생 교육에 힘쓰고 그들을 건국 영웅을 만들려는 일이)이 다 물거품이 되었다.’
김구는 1903년 무렵 제중원에서 일했던 장모 김씨 부인의 딸 최준례와 혼인했다. 김씨부인은 의사 사위를 두었는데 그가 신창희로 김구의 손윗동서다. 신창희는 의학생 때 휴학 등을 하며 황해도 신천과 평산에 의원을 열었다. 미루어 신창희의 출신지가 평산일 가능성이 있다. 그가 개원한 단둥의 ‘평산의원’ 이름도 이를 뒷받침 한다. 평산은 이승만(1875생) 고향이기도 하다.
한편 김씨 부인은 두 딸을 둔 과부였다. 그런데 처형과 장모의 행실이 김구의 눈에 합당치 않았다. 김구 부부가 설득도 해보고, 절연도 해봤지만 허사였다.
그러니 신창희와 처형 부부 사이는 뻔 한일이다. 신창희 부부는 사실상 이혼했다. 이혼한 전처가 조선인 헌병보조원과 살림을 차린 것이다.
전정희 편집위원 lakaja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