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에 살면서 지금까지 이렇게 거대하고 조직적인 사기를 본 적이 없습니다. 두 명은 빚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삶을 마감하고 또 한명은 빚을 갚으려 투잡, 쓰리잡을 뛰다가 청춘인 나이에 돌연사를 했습니다. 분명 사회적 타살입니다. 저희는 더 이상 죽을 수 없습니다”
22일 오전 11시 인천 미추홀구 인천지방법원 법정 423호. 박순남 미추홀구 전세사기피해대책위원회(대책위) 부위원장 말에 법정을 빼곡히 채운 방청객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미추홀구 전세사기를 주도한 이른바 ‘건축왕’ A(61)씨 일당에 대한 재판이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피해자들은 혐의를 부인하고 재판 일정을 자꾸 미루려 하는 듯한 피고인측 태도에 분통을 터트리고 있다.
이날 인천지법 형사1단독 오기두 판사 심리로 열린 3차 공판에서 검찰은 사기 등 혐의로 기소한 A씨와 관련해 “특정경제법 적용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오 판사는 “특정경제법으로 기소되면 단독이 아닌 합의부에서 재판을 담당해야 한다”면서 “합의부 관할이 될 가능성을 고려하면서 재판을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A씨에게 만약 특정경제법이 적용되면 최대 징역 15년을 선고받는 일반 사기죄와 달리 무기징역형 처벌도 가능해진다. 검찰은 전세사기 사건을 수사하면서 개별 피해자의 피해 액수를 근거로 일반 사기죄를 적용했으나 피해자들의 피해액을 합산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당초 이날 하기로 했던 증인신문은 오는 31일 열릴 4차 공판으로 미뤄졌다. 오 판사는 4차 공판에서 전세사기 피해자 등 증인 9명을 오전 3명, 오후 6명으로 나눠 증인신문을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A씨측 변호사가 31일에 경찰 수사가 예정돼 있다며 날짜를 미뤄달라고 요청했으나 오 부장판사는 재판받는 피고인 구속기간을 6개월로 제한한 형사소송법을 들어 “심리를 서둘러야 한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A씨측 변호인은 검찰이 제시한 피해자 진술조서 등에 대한 증거 채택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A씨 측은 지난 3일 열린 2차 공판에서 사기와 공인중개사법위반 혐의를 부인하고 피해자 다수를 증인신청했다. 검찰이 “사실관계가 복잡하거나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 떨어진다면 모르겠지만 직접 피해자들 나와서 진술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고 반박해 결국 양쪽은 적정수준의 증인신문만 진행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또 재판부가 다음 공판기일로 17일을 제시하자 A씨 변호인 측이 24일을 제안, 피해자들이 “시간 끌지 말라”고 항의하기도 했다.
‘평생 만져보지도 못한’ 큰 돈을 갚아야 할 처지에 놓인 피해자들은 재판이 자꾸 지체되고 있다며 애타하고 있다. 생업에도 지장을 받아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는 입장이다. 안상미 대책위 공동위원장은 2차 공판에서 발언기회를 얻자 “저희는 다 일하는 사람들이다. 돈을 잃어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 증언 설 시간이 없는 만큼 피해 진술을 바탕으로 재판을 빨리 끝내줬으면 좋겠다”고 재판부에 요청하기도 했다.
오 부장판사가 방청 중인 전세사기 피해자들에게 발언 기회를 주자 박 부위원장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공모자들은 재산이라도 털어 피해자들에게 돌려달라.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생명줄 같은 돈”이라면서 재판부를 향해 “반드시 죄 대가를 물어 범죄조직죄로 구속, 처벌해달라”고 촉구했다. 피해자들은 지난 3일 2154명이 동의한 탄원서를 제출한 데 이어 이날도 탄원서를 추가 제출했다.
인천과 경기 등에 아파트와 빌라 등 2700여채를 소유한 A씨는 지난 2021년 3월부터 지난해 7월까지 인천 미추홀구에서 아파트와 빌라 등 공동주택 전세보증금 세입자들로부터 받아 가로챈 혐의를 받고 있다.
미추홀구청이 국회 국회교통위원회 소속 심상정 의원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달 말 기준, 건축왕에게 전세사기 당힌 미추홀구 피해 가구는 2484가구에 달한다. 피해 추산액은 무려 2000억원을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피해 가구 중 최우선변제금을 받을 수 있는 가구는 35%에 그친다.
정진용 기자 jjy4791@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