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장을 채우는 건 추적추적 비 내리는 소리, 간간이 들리는 천둥. 장마가 하루 먼저 찾아온 듯한 이곳은 그룹 방탄소년단 멤버 슈가가 연 솔로 콘서트 ‘디-데이’(D-DAY) 현장. 지난 4월 미국 뉴욕을 시작으로 세계 9개 도시에서 28만 관객을 만난 슈가는 25일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실내체육관에서 ‘디 데이’ 여정의 막을 내렸다. 전날부터 이틀간 열린 공연엔 1만5000여명이 다녀갔다.
공연장은 때론 만화 ‘베트맨’ 시리즈 속 고담시 뒷골목처럼 어둡고 거칠었고, 때론 슈가의 방에 들어간 양 아늑하고 소박했다. 객석 쪽으로 길게 뻗은 무대는 슈가와 팬들이 더 가까이에서 호흡할 수 있게 했다. 그 안에서 슈가는 자유로웠다. 대구에서 음악을 독학하던 10대 소년 민윤기가 전 세계의 사랑을 받는 슈퍼스타 슈가가 된 과정을 음악과 퍼포먼스로 풀어냈다. 그 안엔 열정이 있었고 분노가 서렸으며, 애틋함과 그리움이 뒤섞인 듯했다.
슈가는 ‘해금’ ‘대취타’ ‘사람’ ‘디데이’ ‘번 잇’(Burn It) 등 또 다른 예명 어거스트 디(Agust D)로 발매한 솔로곡들과 ‘시소’ ‘섀도우’(Shadow) 등 방탄소년단 음반에 실은 솔로곡을 고루 불렀다. “이 노래는 해금(解禁·금지를 해제함)” 첫 곡으로 ‘해금’을 선곡한 슈가가 이렇게 랩을 하자 관객들은 순식간에 마음의 빗장을 풀었다. 1층은 물론, 2·3층 관객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까딱이고 어깨를 들썩였다. ‘저 달’ 무대에선 “나 솔직히 몇 곡 넣을지 모르겠어”라는 슈가의 읊조림 뒤에 관객들이 “씨이이 X”이라고 ‘떼창’하는 진풍경도 펼쳐졌다.
독하고 처절한, 때론 가시 돋친 감정을 토해낸 자리엔 가장 솔직한 모습의 슈가가 남았다. “잘 나가는 아이돌 래퍼 그 이면엔/ 나약한 자신이 서 있어” 마지막 곡 ‘마지막’에서 슈가는 이렇게 털어놨다. 한쪽에선 충분히 래퍼답지 않다고, 다른 한쪽에서는 충분히 아이돌답지 않다고 손가락질받았던 이의 늦은 고백이었다. 하지만 슈가 곁에는 “다 괜찮아질 거야”(‘스누즈’)라고 함께 외치는 아미(방탄소년단 팬덤)가 있었다. 이날 현장엔 한국, 일본, 중국, 베트남, 아르헨티나 등 세계 각국의 아미가 모여 슈가를 응원했다. 슈가에게 청혼하겠다며 머리에 면사포를 두르고 온 팬들도 눈에 띄었다.
방탄소년단 멤버 지민·정국·뷔도 객석에서 함성을 보탰다. 슈가는 “저의 형제들이 와 있다”며 반가워했다. 방탄소년단의 ‘안무 부장’인 제이홉은 슈가의 이번 공연을 위해 ‘사람 파트2’ 등 일부 곡 안무를 만들어줬다고 한다. 슈가가 ‘시소’를 부르며 연주한 기타엔 방탄소년단 여섯 멤버들의 사인과 ‘파이팅 윤기’ ‘잘 다녀오너라’ 같은 응원 글귀가 적혀 있었다. 방탄소년단은 지난해 6월부터 단체 활동을 잠시 멈췄으나, 멤버들 모두 병역 의무를 마친 2025년쯤 완전체 활동을 재개하기로 뜻을 모았다.
1993년생인 슈가는 2020년 개정된 병역법에 따라 올해 말까지 입영이 연기된 상태다. 자세한 입영 계획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사회복무요원으로 대체 복무할 가능성이 크다. 2012년 교통사고를 당해 왼쪽 어깨를 심하게 다친 영향이다. 팬들에겐 슈가가 입영 전 또 다른 신곡을 내거나 앙코르 공연을 열지가 관심사였는데, 슈가는 “오늘이 진짜 마지막”이라고 몇 번이나 강조하더니 앙코르 공연 소식을 깜짝 발표해 팬들의 기대를 채웠다. 그는 “여러분 덕분에 무척 즐거웠다. 최고의 시간을 선물해주셔서 감사하다”며 “다시 무대에 섰을 땐 (방탄소년단일곱 명으로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앙코르 공연은 오는 8월4·5·6일 서울 올림픽공원 K스포돔(옛 체조경기장)에서 열린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