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서 좌천돼 집에 일찍 들어간 날 진희(최수영)는 뜻밖의 광경을 마주한다. TV에서 흘러나오는 성인영화와 영화를 보며 자위하는 엄마 은미(전혜진)의 모습을. 진희는 아연실색하지만 은미는 태연하다. “너 늦는다며? 전화 좀 하면 어디가 덧나냐?” 진희의 반응도 심상치는 않다. “옷이라도 입고 떠들어”라며 집을 나서더니 친구에게 묻는다. “자위 기구를 사줘야 하나? 손으로 하고 있었거든.” 지금까지 이런 모녀는 없었다. ENA 드라마 ‘남남’이 그리는 모녀는 이제까지 봐온 가족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K드라마 속 가족의 모습이 달라지고 있다. 눈물 콧물 쏙 빼는 신파 대신 엄마를 독립적인 개인으로 묘사하거나(‘남남’), 뒤틀린 모성애로 살인까지 저지르는 악당으로 표현한다(넷플릭스 ‘마스크걸’). 가부장적 질서에서 탈출해 자아를 찾아가는 엄마(JTBC ‘닥터 차정숙’)와 단절된 경력을 잇고자 자신과 같은 처지의 워킹맘을 견제하는 엄마(티빙 ‘잔혹한 인턴’) 이야기도 인기다. 혈연 중심이던 가족의 정의도 바뀌었다. 남남 같던 개인이 대안 가족을 형성하는 이야기가 늘고 있다.
남이 될 수 없지만…때론 남 같은 모녀
‘남남’의 은미는 가족에게 희생하고 헌신하는 K엄마의 전형과 거리가 멀다. 어린 진희와 함께 놀러 간 바다에서 남자들 구경하기 바쁘고, 울분을 삭이느라 집안일을 쥐 잡듯이 한 진희에게 아이스크림과 쫀디기 심부름을 시킨다. 진희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남남’은 은미를 모성애의 화신으로 표현하지 않을 뿐이다. 그보다는 은미와 진희가 각기 다른 성격과 가치관을 지닌 독립적인 개인임을 이야기한다. 거리에서 딸 납치소동을 본 은미는 “세상 어떤 엄마가 애는 나 몰라라 하고 유괴범부터 족치냐. 애가 위험하든 말든 상관도 안 하고”라며 분노하지만, “내가 남이야?”라고 서운해하는 진희에게 “그럼 (네가) 내 몸뚱어리야?”라고 되묻기도 한다.
전에 없던 모녀 이야기는 시청자들에게 공감을 얻으며 입소문을 탔다. ‘남남’은 이야기를 이어갈수록 시청률을 높이더니 10화부턴 4%대(닐슨코리아 전국 기준)를 유지했다. 신드롬급 인기였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이후 ENA 드라마 중에선 가장 높은 시청률이다. 이 드라마 원작인 동명 웹툰도 카카오웹툰에서 누적 조회수 2500만뷰를 기록했다. 은미를 연기한 배우 전혜진은 22일 서울 역삼동 카페에서 기자들과 만나 “처음엔 은미가 센 캐릭터라 걱정했으나 많은 분들이 은미와 진희의 관계에 공감하셨다”며 “아이마다 성향이 다르듯 엄마도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새로운 가족을 상상하다
혈연 중심 가족주의에 미련을 두지 않는 점도 요즘 드라마의 특징이다. 은미는 진희의 생부 진홍(안재욱)과 연애하면서도, 진희에겐 아빠가 아닌 엄마의 남자친구로 생각하라고 못을 박는다. 진희 역시 진홍의 여동생인 지은(우미화)을 ‘고모’가 아닌 ‘이모’라고 부른다. 생부 여동생으로 알기 이전에 엄마 친구로 지은과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한편 어린 시절 가정폭력을 당했던 은미는 자신을 낳은 부모를 가족으로 여기지 않는다. 대신 자신을 돌봐준 친구 미정(김은혜)과 그의 어머니를 “제대로 된 진짜 가족”으로 생각한다.
전통적인 가족상을 파괴하기로는 넷플릭스 화제작 ‘마스크걸’도 만만치 않다. 아들 주오남(안재홍) 살해범을 쫓아 피의 복수를 벌이는 김경자(염혜란)를 통해서다. 극 중 경자는 오남에게 인생을 바쳤다. 하지만 이를 모성애라고 부르기엔 석연치 않다. 남편에게 배신당한 그는 오남에게 자신의 한과 욕망을 투사한다. 복수에 집착하는 이유 역시 오남을 사랑했기 때문이라기 보단 자신이 실은 오남을 부끄러워하고 있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으려는 의도가 더 크다.
경자가 노린 김모미(신예서)를 친구 김예춘(김민서)이 구한다는 설정도 흥미롭다. 드라마에선 미모와 핏줄로 얽힌 김모미(고현정)와 신영희(문숙)가 미모를 위해 몸을 던지지만, 원작 웹툰에선 예춘의 활약이 도드라진다. 원작 작가 매미·희세는 “각자의 모성애가 각자의 모습으로 보이길 바랐고 그 모성애가 다른 사람을 해칠 수도 있는 욕망임을 보여주려고 했다”면서 “하지만 결정적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모성애가 아니라 어린 아이들의 우정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