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웅님, ‘가족여행 금지어’ 한번만 말해주세요”

“임영웅님, ‘가족여행 금지어’ 한번만 말해주세요”

기사승인 2023-11-22 06:05:02
SNS에 올라온 가족여행 금지어 티셔츠. X(구 트위터) 캡쳐


# 김예인(28·가명)씨는 부모님과 해외여행을 하면서 “한국이면 이런 거 안 했을 텐데”란 말이 가장 듣기 싫었다. 김씨는 “비꼬는 의도 없이 해외라 안하던 것도 해본다는 감정에서 말했을지 모르지만, 듣자마자 짜증이 났다”라며 “화가 나다가도 부모님의 이런 모습을 품어주지 못하는 딸이 된 것 같아 슬펐다”고 말했다.


# 성은지(30)씨는 지난달 대만 모녀여행을 떠나기 전 엄마에게 선서를 받았다. “여행은 원래 힘든 것이니 불평하지 않는다”, “대만 음식과 문화를 한국과 비교하거나 평가하지 않는다” 등의 내용이었다. 성씨는 “엄마가 이렇게까지 해야겠냐며 타박했으나 물러설 수 없었다”며 “지키지 않을 시 다시는 해외여행을 같이 가지 않겠다는 초강수까지 뒀다”고 전했다. 

엔데믹 이후 가족 단위 해외여행이 증가하는 분위기와 함께 청년들의 시름도 깊어지고 있다. 부모님과 해외여행을 떠난 자녀들은 각종 불평불만을 듣는 ‘을(乙)’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에 2030세대를 중심으로 해외여행에서 부모님이 자식들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정리한 ‘가족여행 금지어 십계명’이 유행하고 있다.

최근 SNS와 유튜브 등을 중심으로 가족여행 시 부모님의 금지어가 널리 퍼지고 있다. ‘가족여행 금지어 십계명’엔 △ “아직 멀었냐” △ “음식이 달다, 짜다” △ “겨우 이거 보러 왔냐” △ “이 돈이면 집에서 해 먹는 게 낫다” △ “이거 한국 돈으로 얼마냐” 등의 내용이 담겼다. 최근 코미디언 박미선이 제작진 요청으로 가족여행 금지어를 선서하는 영상은 210만 조회수와 1000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다. 댓글엔 “딸한테 그것도 못 말하냐도 금지해야 한다” “끼니마다 김치 찾는 거 금지도 추가해달라”, “집에 가고 싶다도 넣어 달라” 등 가족여행 금지어를 반기는 반응이었다.

코미디언 박미선이 가족여행 금지어 십계명을 외치고 있는 모습. 유튜브 미선임파서블 캡쳐


청년들에겐 가족여행 금지어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는 분위기다. 지난 5월 부모님과 형제 그리고 조카들과 함께 세부여행을 다녀온 이지은(29·가명)씨는 여행 도중 가족들의 말과 행동에 상처를 입은 기억이 있다. 이씨 역시 처음 간 곳이지만, 돌발 상황이 생기면 가족들은 그에게 왜 몰랐냐고 타박했다. 이씨는 “낯선 장소라 다들 예민해진 상황에서 문득문득 나오는 말과 행동에 상처를 받았다”며 “임영웅님이 눈물 흘리며 가족여행에서 이런 말 하지 말아달라고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자녀와 가족여행을 떠나는 부모님 입장에선 금지어 지정이 당황스러운 상황이다. 자녀와 5번의 해외여행을 간 경험이 있는 전모(62)씨는 온라인에서 유행하는 ‘부모님 금지어 십계명’를 보고 크게 놀랐다. 해외여행 당시 전씨가 자녀들에게 했던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씨는 “별 뜻 없이 한 이야기인데 금지어로 정할 정도인가 싶다”라며 “꼬투리를 잡으려고 한 말은 아니었고, 가족끼리 할 수 있는 일반적인 대화라고 생각했다. 자녀들이 이렇게 생각할 줄 몰랐다”고 털어놨다. 

가족여행 금지어를 직접 사용해 효과를 본 청년도 있다. 직장인 강민정(33)씨는 지난 9월 부모님의 환갑 기념 여행 전 “비싸다, 양이 적다, 이게 뭐냐”등 금지어를 공지했다. 강씨는 “패키지 여행을 권했지만 부모님이 동행을 요청하셔서 금지어를 정했다”며 “비행기에 타기 전후, 호텔 도착, 식사 전후에도 계속 금지어를 상기시켰다. 이후 금지어를 말하긴 해도 자제하시는 게 보였다”고 말했다. 이어 “아무리 효도 여행이라지만 같이 보내는 시간이 편하고 즐거워야 하지 않느냐”며 “가족이어도 서로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는 목표중심적이고 실용적인 기성세대의 사고와 경험을 소중히 여기는 2030세대의 가치가 상충하며 발생한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임명호 단국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는 가족여행 금지어에 대해 “기성세대는 더 좋은 여행이란 목표를 두고 한 말일 것”이라며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루며 나타난 성취중심주의와 실용주의적인 사고의 잔재다. ‘아직 멀었냐’와 ‘겨우 이거 보러 왔냐’는 성취‧목표중심주의, ‘이 돈이면 집에서 해먹겠다’와 ‘한국 돈으로 얼마냐’는 실용‧절약적 사고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한국 사회는 경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회로 가고 있기 때문에 기성세대가 양보하는 게 맞다”고 제안했다.

유민지 기자 mj@kukinews.com
유민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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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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