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대라는 서사 [취재진담]

명문대라는 서사 [취재진담]

기사승인 2024-09-04 06:00:05
게티이미지뱅크

지난달 수도권 명문대생을 중심으로 구성된 연합동아리에서 마약 투약 및 유통 사실이 검찰 조사를 통해 알려졌다. 이후 언론보도는 SKY 출신의 동아리 회장의 신상, 마약을 접한 시기 및 유통 방법, 동아리원 출신학교와 직업 등에 집중됐다. 대학생들에게까지 퍼진 마약 대중화 및 마약 사범 연소화 등은 ‘명문대생’의 일탈이란 그림자에 가려졌다.

언론 보도 이후 이들을 옹호하기보다 비판하는 여론이 컸으나, 이들의 행적을 안타깝게 여기는 의견도 상당했다.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들의 안타까운 선택이다” “공부만 하다 세상 물정을 몰랐나 보다” “모범생들이 잠시 일탈을 꿈꾼 것 같다” 등 이들을 딱하게 여겼다. 집단으로 마약을 투약하고 성범죄를 저지른 대학생들은 지워지고, 어린 나이에 마약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던 순진무구한 대학생들만 남았다.

범죄 혐의자에게 부여하는 서사는 범죄의 심각성을 가리고 수사와 재판에서 처벌을 줄이곤 한다. 명문 대학과 좋은 직장은 죄에 합당하는 처벌을 피하는 일종의 스펙이자, 재판부에서도 꽤 잘 통하는 요소다. 그간 사법부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성실하게 살아왔다” “대학생이고 기존 처벌 전력이 없으며 평소 행실이 온건했다” 등의 이유로 형을 덜어주곤 했다. 이에 반성문과 봉사활동 외에도 학창 시절 생활기록부, 성적우수상, 대학 성적표 등의 자료로 기소유예를 이끌었다고 홍보하는 법무법인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대학생들의 마약 투약‧유통을 젊은 날의 일탈로 치부하기엔 우리 사회에 마약은 넓고 또 깊게 펴졌다. 이제 마약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일부 상류층 및 특권계층 사이에서 몰래 투약하는 수준을 넘어섰다. 지난 6월 대검찰청이 발간한 ‘마약류 범죄 백서’에 따르면 10·20세대 마약류 사범은 2019년 3760명에서 지난해 9845명으로 5년 사이 27.2%가 증가했다. 전 연령층에서 같은 기간 14.5%가 증가한 것과 비교하면 마약사범 저연령화는 더 가속화되는 추세다.

정부의 ‘마약과의 전쟁’ 선포가 무색하다. 대학가, 청년들의 핫플레이스는 이미 마약을 접하기 쉬운 곳이 돼버렸다. 재범률이 높은 마약범죄에 손을 뻗은 청년들은 ‘젊은 날의 객기’ ‘허영’ ‘일탈’이라는 핑계를 무기삼아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은 채 마약에 손대길 반복한다. 마약 투약으로 재판에 넘겨져도 벌금형, 집행유예 등 가벼운 형을 받는다는 인식은 덤이다.

‘마약 청정국’ 지위 회복도, 마약 범죄 혐의자에 대한 합당한 처분도 명문대라는 서사를 떼어야 비로소 보일 것이다. 범죄 혐의자들 스스로 사안의 중대성 및 위험성을 인지할 수 있는 처벌이 필요하다. “선처해서 공부 잘하는 학생 앞길을 막지 마라”가 아닌 “평범한 대학생들까지 퍼진 마약 범죄 실태를 파악해 수요와 공급을 억제하라”는 목소리가 나오게 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다. 
유민지 기자
mj@kukinews.com
유민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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