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장준호 경인교대 교수 "어쩌다 어린세대에 이런 참담한 사회를 만들어줬나"

[기고] 장준호 경인교대 교수 "어쩌다 어린세대에 이런 참담한 사회를 만들어줬나"

기사승인 2016-11-14 14:06:03

지난 ‘11·12 촛불집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헌법 유린에 관한 김제동의 발언을 들으며 1주일 전 대구 소녀의 청명한 외침을 떠올렸다. 그와 그녀의 분석이 정확했기 때문이었다. 소녀는 처참한 현실의 근원과 본질이 최순실이 아니라 박근혜라고 규정하며, 대통령의 피해자 코스프레 사과에 대해 우리는 꼭두각시 공주의 어린양을 받아주는 개, 돼지가 아니다라고 외쳤다.

의미 없는 진실게임의 중단, 진심어린 책임적 사과, 투명한 검찰수사,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했다. 나아가 그녀는 두렵다고 말했다. 민주를 향한 시민사회의 노력이 헛될까봐, 사건이 그냥 잊혀 질까봐, 나아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사회에서 계속 살게 될까봐, 어린 소녀는 두려웠던 것이다. 어린 소녀가 느끼는 슬픔, 상처, 분노, 두려움은 우리의 마음에서 느끼는 것과 같았다. 에토스(대중과의 교감), 파토스(감정의 표현), 로고스(논리적 타당성)를 갖춘 훌륭한 연설이었다.

어린 소녀의 순수한 정의감과 두려움이 표현된 연설을 눈물과 함께 들으며 창피함이 몰려들었다. 어른들은 어쩌다가 어린 자식들에게 참담한 사회를 만들어줬나? 주변의 많은 지인은 요즘 들어 가슴이 답답하고 부끄럽고 창피하지만 참고 있다고 말한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겠지라고 하면서 그냥 참고 있으면 대구 소녀가 예감하는 두려움이 현실화될지도 모른다. 이 사태는 그냥 잊히고 우리는 정의롭지 않은 세상에서 계속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뉴욕타임스의 만평이 정확히 그려낸 것처럼 강남 속물 아줌마 최순실이 박 대통령의 머리 뚜껑을 열고 들어가 그 안에서 영혼 없는 대통령을 조정하며 국정을 농단하고 사익을 추구했던 사태를 마냥 참고 있어야만 하는가? 그런 대통령을 여전히 대통령으로 인정해야 할 것인가? 그런 대통령을 인정할 수 없어서 남녀노소 100만 시민이 광화문 광장으로 나와 박근혜 퇴진을 외쳤다.

인정에는 형식적 측면과 실질적 측면이 있다. 법에 의한 형식적 측면으로 보았을 때 박근혜는 여전히 대통령이지만, 도덕적 정당성과 민심에 의한 실질적 측면에서는 이미 대통령이 아니다. 국민이 박대통령을 도덕적, 윤리적 차원에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114일 리얼미터와 1111일 한국갤럽의 여론조사에 따른 5%의 대통령 지지율은 박 대통령을 실질적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는 민심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형식적인 법적 테두리 안에서 대통령의 지위를 지켜내려고 한다. 박 대통령의 이러한 인정투쟁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국정공백 사태를 초래한 당사자가 국정공백을 내버려둘 수 없다는 논리로 대통령의 지위를 지키겠다는 그녀의 모습에서 붉은 뺨을 가진 야수의 부끄러움도 감지할 수 없다.

박 대통령의 염치없는 버티기는 헌법을 위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법에 의존하는 형식적 인정투쟁이다. 반면, 시민사회가 나선 촛불집회는 박 대통령의 형식적 인정투쟁에 대항하여 법치, 정의, 상식의 회복을 주장하는 실질적 인정투쟁이다. 염치와 정의가 있어야 공동체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시민사회는 이승만의 부정선거에 대항한 19604·19와 전두환의 호헌선언에 대항한 19876월 항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당시 시민사회는 반독재 민주주의를 원했다. 강자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법치가 아니라 모든 이의 이익을 수렴하는 정의와 법치를 원하고 그것을 실현하려고 했던 실질적 인정투쟁이 시민사회의 핵심 동력이었다. 11·12 광화문 광장의 촛불집회도 우리의 역사에서 시민사회가 걸어왔던 인정투쟁의 연속이라고 볼 수 있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시민사회는 정치권의 권력과 시장의 자본에 의해 왜곡된 우리의 생활세계를 건강하게 회복시키는 공적 의사소통의 장이다. 11·12 촛불집회는 상처의 치유를 향한 시민사회의 현상이었다. 촛불집회는 생활세계의 시민이 참여하는 공적 의사소통의 장으로서 박 대통령과 그 비선실세에 의해 완전히 왜곡되고 찢겨진 국정과 생활세계를 반성하고 성찰하는 장소가 됐다.

공론장은 시민의 자유발언과 더불어 저녁 늦게까지 옹기종기 앉아 소통하는 시민의 모습으로 발현됐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환상의 잔재였던 박근혜정부의 형편없는 국정관리, 박근혜의 진실을 알지 못한 채로 대통령으로 선출한 시민의 무지, 그러한 시민의 무지에 책임이 있는 언론의 정보통제, 우리가 바라는 대통령의 건강한 모습, 진정한 민주주의의 모습, 향후 정국에 대한 정치권의 책임 있는 입장과 수습 등 성찰할 것이 너무나 많았다.

시민사회가 평화롭게 주도했던 촛불집회는 시민 스스로 자신을 치유하는 계기도 마련했다. 공적 의사소통의 장에 참가해 타자와 함께 올바른 것과 타당한 것을 확인하는 과정은 양심의 회복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양심은 행위 전에 올바른 것을 알려주고 행위 후에는 자부심과 수치심을 유발한다. 박 대통령이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며 양심을 속였다면 시민은 공적 소통의 장인 촛불집회에 참가하며 양심을 회복시켰다.

시민의 도덕성이 대통령의 도덕성보다 우위를 점하게 됐다. 촛불집회가 계속될수록 시민은 자부심을 느끼고 대통령은 수치심과 자괴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100만 시민의 촛불집회는 활활 타오르는 집단 양심의 힘이었다. 그 시민의 힘을 알아차리고 박 대통령이 퇴진하면 시민의 상처와 아픔이 더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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