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이소연 기자] 박근혜 대통령이 18년 정치인생에서 최악의 위기를 맞았다.
9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박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찬성 234, 반대 56, 기권 2, 무효 7로 가결됐다. 박 대통령의 직무는 헌법재판소의 심판이 나올 때까지 모두 정지된다. 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5%로 바닥을 친 상황에서 사실상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한 상황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 1998년 4월 대구 달성 재·보궐 선거에서 당선되며 정계에 발을 디뎠다. 지난 79년 아버지인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후 사실상 은둔 생활을 해왔으나 “IMF라는 국가적 위기를 방관할 수 없다”며 대중 앞에 나선 것이다. 이후 박 대통령은 고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를 가진 이들로부터 ‘아이돌’급 인기를 얻으며 정치인으로서의 입지를 다져왔다.
박 대통령의 능력은 당의 위기 상황에서 발휘됐다. 지난 2004년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당시 이를 가결시킨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은 국민의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당시 당 지지율은 10%대로 추락했다. 같은 해 4월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50석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이때 박 대통령은 수렁에 빠진 한나라당의 당 대표로 선출되며 정치인으로서 한 계단 더 올라섰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공원에 컨테이너와 천막 등으로 ‘천막당사’를 설치한 후, 그곳에서 당 대표 생활을 시작했다. 시민들 사이에서는 박 대통령에 대한 동정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이러한 기류를 타고 한나라당은 총선에서 121석을 확보했다. 박 대통령의 당내 입지 역시 더욱 단단해졌다. 그는 2년 3개월간의 당 대표 재임 기간, 모든 선거를 승리로 이끌며, 유력 대권 주자로서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한 차례 위기도 있었다. 지난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패배한 뒤, 박 대통령은 당내 비주류로 전락했다. 이듬해 18대 총선에서는 친박(친박근혜)계가 대거 공천에서 배제당하는 이른바 ‘공천 학살’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2011년 한나라당이 서울시장 보선 패배, 디도스 공격 의혹 등으로 위기에 직면하자 구원투수로 재차 등판했다. 박 대통령은 당의 이름과 로고 등을 모두 바꾸는 개혁을 추진했다. 한나라당은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꾼 후, 19대 총선에서 야당을 누르고 과반의석(152석)을 차지했다.
지난 2012년 당내 경선에서 압도적인 지지율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됐고, 같은 해 12월 민주당 문재인 후보를 상대로 51.6%의 득표율을 획득하며 18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39년 만의 청와대 재입성이었다. 취임 이후에도 30%대 ‘콘크리트 지지층’을 기반으로 창조경제, 대북 압박정책, 노동개혁, 국정 역사교과서 등 박근혜표 정책들을 추진해왔다.
그러나 임기 4년 차인 2016년 ‘비선 실세’ 최순실씨의 국정농단 의혹이 불거지며 국민의 신뢰를 잃게 됐고, 헌정 사상 두 번째로 탄핵을 당한 대통령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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