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김정우 기자] 한국 PC게임의 전성기 대표작을 꼽으라면 미우나 고우나 엔씨소프트가 1998년 선보인 ‘리니지’를 떠올리게 된다. 국산 MMORPG(다중접속대규모역할수행게임)의 황금기를 이끈 타이틀이자 ‘게임 폐인’, ‘현질(게임 아이템 현금 거래)’ 등의 사회적 이슈까지 대두시킨 당대의 화제작이다.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리니지는 엔씨소프트의 간판 타이틀이다. 국내 게임업계의 무게중심이 스마트폰으로 옮겨가는 상황에도 지난해 엔씨소프트의 연간 매출 9836억원 중 3755억원은 리니지에서 발생했다. ‘리니지2’의 771억원까지 더하면 전체 게임 매출의 약 46%에 달한다.
2000년대 많은 국내 게임사들이 유사한 MMORPG를 쏟아낸 것은 리니지의 영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에는 넷마블이 엔씨소프트에 로열티를 줘가며 내놓은 모바일 MMORPG ‘리니지2 레볼루션’이 출시 한 달 만에 2000억원이 넘는 매출을 올리며 국산 게임의 역사를 새로 쓰기도 했다.
엔씨소프트도 이 ‘역사’를 이어가고 싶은 모양이다. 지난해 하반기 리니지 시리즈의 정식 후속작인 ‘리니지 이터널’이 첫 CBT(비공개테스트)를 마쳤고 소홀했던 모바일에서도 ‘리니지 레드나이츠’를 선보였다. 올해는 리니지 이터널의 정식 출시와 오리지널 리니지를 모바일로 컨버전한 ‘리니지 M’이 기다리고 있다.
반면, 엔씨소프트가 ‘과거의 영광’에 지나치게 얽매이는 것은 아닌지 우려도 된다. 출시까지 시간이 남았지만 CBT에서 리니지 이터널은 20년 전의 다소 촌스러운 캐릭터 디자인을 그대로 재현해 오래된 유저층인 이른바 ‘린저씨(리니지+아저씨)’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미려한 그래픽과 여러 캐릭터를 번갈아 사용하는 참신한 시스템도 이런 식상함에 빚이 바랬다. 리니지를 모바일로 고스란히 옮겨 놓은 리니지 M의 공개 영상은 두말할 것도 없다.
대표작의 세계관을 계승‧발전시키는 것은 IP의 중요성이 날로 강조되는 추세에 맞는 전략이다. 하지만 게임사의 핵심 경쟁력인 창의성을 가리는 ‘양날의 칼’이 될 수도 있다. 새로운 장르와 시스템, IP를 꾸준히 개발해야 하는 이유다. 블리자드가 ‘디아블로’, ‘워크래프트’ 등의 세계관을 꾸준히 늘려가면서도 ‘오버워치’와 같은 신작으로 유저들을 열광시킨 것에서 알 수 있다.
엔씨소프트는 최근 개발 중이던 FPS(1인칭슈팅)게임 ‘프로젝트 AMP’의 개발을 중단했다. MMORPG에 특화된 이미지를 벗고 기술력을 과시할 수 있는 타이틀이 하나 사라진 것이다. 대신 리니지 이터널과 북미 등 해외 시장을 주 타깃으로 하는 슈팅게임 ‘MXM’의 개발에 총력을 기울일 것으로 알려졌다. MXM은 엔씨소프트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줄 몇 안남은 타이틀이 됐다.
엔씨소프트의 한 직원은 자신들을 ‘큰 배’ 비유했다. 새로운 시도를 이어가고 있지만 덩치가 커진 나머지 가던 방향을 선회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의미다. 늦은 감이 있어도 모바일게임 시장을 놓치지 않으려 분주하게 뛰는 최근 모습에는 응원을 보내고 싶다. 다만 따라가기보다 앞서가려면 과거 리니지가 그랬듯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조급하지 않게 천천히 돌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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