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하나= 세월호가 침몰한 지 19일째.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운영되던 임시 가족대책본부에는 수색 중 발견된 유류품과 사망자의 정보가 적힌 종이가 붙곤 했다. 종이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한참을 바라보던 이들 사이에서 의미심장한 대화가 오갔다.
남자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며 자리를 떴다. 종이에는 ‘OOO번째 수습된 희생자’의 수색 정보가 적혀 있었다. 곧 단발머리 소녀가 달려왔다. 소녀는 수차례 희생자의 이름을 외쳤다. 비명에 가까운 절규를 하던 소녀는 끝내 자리에 주저앉아 몸부림쳤다. 몇 시간 후 진도실내체육관에 마련된 대형 전광판에서 새로 수습된 희생자의 소식을 전하는 뉴스가 방송됐다. 그 소녀였다.
“희생자의 언니가 오열하자 주변은 울음바다로 변했습니다.”
#장면 둘= 세월호 침몰 3일째. 진도실내체육관은 눅눅하고 쾌쾌한 공기로 가득차 있었다. 실종자 가족들은 1층에 돗자리와 종이박스를 바닥에 깔아놓고 쪽잠을 잤다. 아침부터 누군가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훌쩍였고 다른 이는 갈라진 목소리로 통곡했다.
2층으로 이어진 계단 구석에 사십대 중후반의 여성이 걸터앉아 있다. 눈두덩이는 퉁퉁 부어있고 충혈된 눈에는 눈물이 말라붙어 있었다. 그는 계단 옆 30센티미터의 작은 유리 사이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시선 끝 어디에도 바다는 보이지 않지만 바다를 찾고 있었다. 그의 아이는 바다에 있다. 한참 떨어진 맹골수도, 그곳에 가라앉은 세월호 안에. 체육관에 모여 있는 가족들은 생환을 염원하며 기다린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가 마른다. 극도의 긴장과 불안, 초조, 걱정, 분노 등의 감정이 매순간 파도친다. 이런 와중에도 잔인한 시간은 계속 흘르고 있었다.
비극적인 상황에서 발현되는 생리적 욕구는 당사자에게 까닭모를 죄의식을 가져오기도 한다. 친지를 떠나보낸 이가 슬픔 속에서 허기를 느끼는 것과 유사하다. 이곳에 모인 이들 중에는 식사를 거부하거나 억지로 밥을 삼킨 후 다시 토해내는 이가 적지 않았다.
세월호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것’이 함께 딸려 올라왔다. ‘그것’은 눈을 크게 뜨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위협이다. 지난 3년 동안 곳곳에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유엔(UN)의 CPPCG 2조에는 다음의 항목이 포함돼 있다. "집단의 구성원에 대하여 중대한 육체적 또는 정신적 위해를 가하는 것." 우리에게 대입하면 집단이란 세월호 참사로 의한 피해자와 이를 속절없이 지켜봐야했던 한국사회 대다수, ‘국민’도 포함된다. 이는 어쩌면 우리 사회 구성원 다수가 세월호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는 시그널일지도 모른다. 세월호 참사 피해자는 우리 모두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이를 인지하지 못했거나 부정당했을 뿐이다.
지난 3년 동안 트라우마의 표출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뤄져 왔다. 혹자는 추모로, 다른 이는 분노로, 더러 인지부조화에 빠져 재난 자체를 부정하는 이들마저 속출, 극렬한 대립마저 야기했다. 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라 세월호는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저마다의 가슴에 강제로 박힌 트라우마의 씨앗은 이미 뿌리를 내리고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져버린 것은 아닐까. 혼란한 국내 정세가 채 마무리되기도 전에 떠오른 세월호와 이로 인한 트라우마는 그 어느 때보다 무시무시한 것은 아닐까.
일반 대중의 세월호 트라우마 관리와 관련해 정부는 대책 마련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지 않아 보인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별다른 의지를 갖고 있지 않은 것 같아 보인다. 국내 유수의 의료기관과 정신의학 전문가들이 잇달아 논문과 보고서를 통해 심각성을 지적했지만, 보건당국 차원의 대책은 사건 발생 3년 동안 전무하다시피 했다.
재난이나 사고로 인한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는 개인이 극복해야 할, 개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 공감대는 있지만 현실은 이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세월호 생존자, 유가족, 미수습자 가족들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까지 치유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 세월호를 비롯해 국가재난에 대해 정부 주도의 장기간, 대규모의 정신건강 대책은 언제쯤 마련될 수 있을까? 보건당국은 어떤 복안을 갖고 있을까? ange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