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외길, 옹기 장인의 뚝심

50년 외길, 옹기 장인의 뚝심

기사승인 2017-07-31 16:34:28

 

[쿠키뉴스 영덕=김희정 기자] 경상북도는 2013년부터 전통을 유지하며 명맥을 이어온 향토뿌리기업을 육성하고 있다.

향토뿌리기업은 대를 이어 30년 이상 전통산업을 영위하며 지역 발전에 기여한 사업체다.

하지만 경북의 산업·문화적 소중한 자산인 이들 기업은 그동안 산업 발전과 함께 관심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던 게 사실이다.

도는 향토뿌리기업의 고풍스런 옛 외관을 보존하고, 지역 타 관광지와 연계한 스토리텔링 등을 통해 관광명소로 개발하는 등 지속 보존 방안을 모색해 나가고 있다.

경북의 오랜 전통과 역사를 품은 곳. 지금도 새로운 이야기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향토뿌리기업을 들여다본다. <편집자 주>

경북 영덕군 지품면 오천리에는 4대를 이어온 옹기집안이 있다. 2003년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25-나호 영덕옹기장에 지정된 백광훈(67)씨가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주인공이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 뒤를 이어 아버지와 함께 옹기를 빚고 있다.

 

◆ 14살, 먹고 살기위해 시작한 옹기
14살 되던 해 옹기를 배우기 시작한 백광훈씨는 증조부 때부터 할아버지, 아버지, 형까지 옹기장이를 하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나라 전체가 가난했고, 농촌은 더 가난했다. 감자 키우고 나락 팔아 간신히 입에 풀칠하던 시절, 그나마 옹기를 만들어 팔면 돈은 만질 수는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그렇게 옹기를 만들며 생업에 뛰어들었다.

“그 시절에는 다들 어려웠겠지만 우리 동네만 해도 하루 세끼 밥은 고작하고 죽도 못 먹는 집도 많았어요. 어린 시절에야 먹고 살기위해 시작한 옹기장이지만, 지금은 힘들어도 놓을 수 없는 제 천직입니다.”

“아버님이 옹기 만드시는 것을 보고 자랐습니다마는 실질적으로 옹기 만드는 기술은 형님께 배웠습니다. 맏형은 40년, 둘째형은 20년 정도 옹기 굽는 일에 종사했지요. 크고 작은 옹기를 손으로 다 빚어 만드는 일이 지금도 힘든데 어릴 때에는 오죽했겠습니까?”

그는 처음부터 옹기 만드는 일에 소질을 보이기 시작했다. 옹기를 배우기 시작한 지 20일 정도 지날 무렵 자신이 만든 옹기가 가마에 들어가게 됐던 것이다. 옹기 만드는 기술을 빨리 익혔고 완성도가 높았다는 얘기다. 힘들지만 자부심을 가질 만 했다.

10대 후반에는 서울과 강원도 등지에서 옹기 만드는 일을 도왔는데 당시 그가 옹기를 만들기 시작하면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고 한다. 옹기를 만드는 속도도 빠르고 완성도도 높았기 때문이었다. 작은 항아리 뚜껑 같은 경우 하루에 800~900개를 만들 정도였다.

실력으로 인정받은 만큼 일거리도 많았다. 특히 여름 끝 무렵부터 김장철까지는 하루에 4시간도 채 잠을 못 잤다. 옹기를 만들어 내는 대로 바로 팔려 나갔기 때문이다.

20대 후반부터 40대까지는 옹기를 직접 만들지 못했다. 들어오는 주문 관리와 판매처 관리 등 영업, 관리, 마케팅까지 모두 혼자서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 옹기의 전성기와 쇠퇴기
영덕 일대에는 40여 년 전만 해도 영덕읍 화개리, 지품면 오천리, 삼화1리, 달산면 홍기리, 축사면 망골 등 4개 지역에 옹기굴이 있었다.

하지만 1985년 이후에는 시절에 밀려 전부 문을 닫았다. 산업화로 플라스틱 붐이 일고부터 옹기를 쓰는 사람들이 점차 없어지고, 20여 년 전부터는 옹기 만드는 일도 기업화돼 대량생산, 대량 판매되기 시작하자 전통옹기는 경쟁력을 잃게 된 것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옹기의 전성시대였습니다. 인근 마을까지 치면 옹기 만드는 집이 30집이 넘었으니까요. 그만큼 옹기를 쓰는 사람들도 많았다는 거죠.”

“그런데 198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옹기 만드는 집이 급격하게 줄어들었습니다. 플라스틱 용기가 싼 값에 팔리니까 가격경쟁에서 도저히 버틸 수 없었지요.”

가볍고 쓰기 편하고 가격도 저렴한 플라스틱 용기가 급속도로 각 집안의 세간을 장악했다. 이 무렵 울산에서는 옹기에 화학약품이 들어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누군가 고발을 하는 바람에 옹기 만드는 사람 몇몇이 구속되는 일이 있었다.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그를 비롯한 옹기 만드는 사람들은 그대로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관련 기관에 의뢰해 옹기에 인체에 유해한 화학성분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보고, 또 직접 실험을 해보는 등 대책을 마련했다.
 
옹기장이들은 옹기와 플라스틱, 고무대야, 유리 용기에 각각 물을 담아 뚜껑을 덮고 햇볕 아래 일정시간 놓아둔 뒤 물맛을 보기로 했다.

“고무대야와 플라스틱에 담긴 물과 옹기에 담긴 물맛은 누가 맛을 봐도 달랐습니다. 그나마 유리 용기에 담긴 물맛은 조금 나았지만 옹기에 담긴 물 보다는 못했어요. 해당 기관에 맡긴 실험도 인체에 해롭지 않다고 결론이 났죠. 구속됐던 사람들도 당연히 풀려났고요.”

이 일로 옹기에 대한 사람들의 불신이 사라지고 옹기 자체가 다른 재질의 용기보다 좋다는 게 알려지게 됐다. 하지만 값 싼 플라스틱 용기의 공세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더욱이 마을의 옹기장이 가운데 70~80%는 뛰어난 기술을 지닌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농사보다는 옹기 만드는 일이 수입이 나아 업으로 삼았던 터라 돈벌이가 시원치 않자 옹기장이들은 점차 마을을 떠나거나 다른 일을 하게 됐다.

그렇게 옹기를 만드는 일은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이후 유일하게 이곳, 지품면 오천리 316-2 그의 작업장만이 남아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 전통옹기 제조법 고집
플라스틱 용기의 등장으로 옹기가 사양길로 접어들자 그는 옹기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대부분을 어쩔 수 없이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 직접 옹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옹기 제작 주문은 전보다 줄었다. 하지만 그만큼 옹기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늘었다. 그는 그 시간에 더 좋은 품질의 옹기를 만들었다.

그동안은 대부분 옹기 도매상을 상대로 팔아왔는데 이때부터 소비자와 직거래를 하기 시작했다. 좋은 옹기는 소비자가 더 잘 알아봤다. 주문도 점차 늘었다.

특히 그가 태어난 영덕 오천의 옹기는 경북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서 깊은 것으로 그는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 재래식 옹기 제조법을 전승해가고 있다.

흙을 고르는 일에서부터 옹기를 빚고 굽는 일까지, 연기와 탁한 공기 속에서 하루 종일 땀을 흘리면서도 이 일을 천직으로 생각하며 그만의 고집스러움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산에서 흐르는 냇물이 좋고, 지품면 눌곡리에서 용덕리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농로 길의 흙이 옹기 흙으로는 아주 우수해서 지금도 이용됩니다. 유약용 약토는 타 지역 옹기공장에서도 많이 이용하는 오천 기계들 천수답의 흙이 좋아서 캐거나 사와서 재료로 삼지요.”

그는 여기에 나무를 태운 재를 섞어 잿물(천연 유약)을 만들어 입힘으로써 천연 무공해 옹기를 100% 수작업으로 제작하고 있다. 지금도 1년에 한 번 장작가마에서 옹기를 굽는다. 한 번 작업을 하면 3000개 정도의 옹기가 탄생한다.

장작가마 이외에 전기가마, 석유가마 등 기계식 가마도 사용하고 있지만 장작가마에서 굽는 것과 기계식 가마에서 굽는 것은 차이가 있다고 한다.

기계식은 옹기의 아랫부분과 윗부분을 만들어 붙이는 방식으로 만들지만 전통방식으로 옹기를 빚을 때는 옹기 안에 참숯이나 솔가지로 불을 피우고 말린다.

술 단지처럼 큰 옹기를 만들 때는 안과 밖에서 모두 불을 피우고 고개를 옹기 속에 들이밀어 일을 해야 한다. 때문에 온 얼굴이 땀과 열기 그리고 탁한 연기로 뒤범벅이 된다. 불에 얼굴이 타 들어가는 것 같은 고통을 견뎌야 한다.

그는 “그만큼 힘든 일이다보니 예부터 ‘옹기장이의 수명은 예순 살을 넘기는 일이 잘 없다’고 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기계식 가마는 10~15시간 정도 구운 후 열기를 식히는 반면, 장작가마는 15일 동안 불을 때서 옹기를 굽는다. 흙이 불기운에 녹으면서 굳어지는 동안 품질 좋은 옹기가 완성된다. 15일 동안 불을 살펴야 하는데 잠시라도 자리를 비울 수 없어 가족들도 일손을 돕는다.

옹기를 굽는 15일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그는 그 기간 동안 하루에 2~3시간도 제대로 못 잔다. 그나마도 가족들이 교대를 해줘 잠시 눈을 붙일 수 있다.

“마지막 날은 거의 제정신이 아닙니다. 1가마에 보통 3500개 정도의 옹기가 들어가는데, 그것들이 커다란 덩어리 하나로 보이는 환각까지 일어나지요.”

 

◆ 생활 속에서 더 빛나는 그의 옹기
그렇게 노력한 결과, 처음에는 값싸고 겉이 반지르르한 기계식 대량생산 옹기를 찾던 소비자들로부터도 차츰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기계화, 대량생산이 밀어 닥친 지 꼬박 3년 만이었다. ‘물건이 다르다’ 그의 옹기를 써 본 사람들의 입소문을 통해 옹기를 사러 오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고, 20년이 훌쩍 지난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그는 이렇듯 우수한 영덕전통옹기의 명맥을 체계적으로 전승하기 위해 지난 2010년 문화재청, 경북도, 영덕군의 지원을 받아 전수교육관을 건립했다. 총 사업비 9억원을 들여 연면적 328.42㎡(99.3평) 규모로 지어졌으며, 1층에는 사무실, 회의실, 전수교육관이, 2층에는 옹기제작 전 과정을 디오라마로 보여주는 전시실을 갖추고 있다.

유치원생부터 초·중·고교생들은 전수교육관에서 직접 1일 옹기장이 돼 물레도 돌려보고 전통옹기가마, 전수교육관 견학 등을 통해 영덕 옹기의 역사를 공부한다.

1년에 1가마를 굽는 것도 이제 힘에 부치는 그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아들 민규(37)씨다.

민규씨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어깨너머로 옹기 일을 보면서 커서 꼭 아버지의 뒤를 잇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하지만 그는 아들을 작업장에서 내쫓고, 가마 근처엔 얼씬도 못하게 했다. 이토록 힘든 옹기장의 삶을 아들에게까지 물려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서도 아버지의 뒤를 잇겠다는 아들의 확고한 결심과 300년 영덕 옹기의 맥이 끊길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그를 움직였다. 민규씨는 7년 전부터 그의 옆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옹기제작의 모든 것을 전수받고 있다.

그는 “옹기는 한국 사람이라면 꼭 필요하다. 앞으로도 우리 부자가 만든 옹기를 찾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열과 성을 다해 전통옹기에 혼을 불어 넣을 것”이라고 말했다.

술독, 고추장 옹기, 된장 옹기, 간장 옹기, 김장용 옹기, 효소를 발효시키는 옹기 등 그의 손으로 만들어진 옹기는 사람들의 생활공간에서 더 빛난다. 사람들 속에서 묵묵히 그 역할을 다하는 옹기에는 대를 이어 옹기를 빚어온 50년 외길 인생. 장인의 뚝심이 담겨있다.

shine@kukinews.com

김희정 기자
shine@kukinews.com
김희정 기자
이 기사 어떻게 생각하세요
  • 추천해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추천기사
많이 본 기사
오피니언
실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