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어깨너머로 보고 배운 것이 옹기 만드는 일이었다. 1959년엔 자신의 옹기공장을 마련하고 본격적으로 옹기를 빚기 시작했다. 그리고 58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쉼 없이 옹기를 만들고 있다. 옹기를 빚듯 스스로를 빚어온 이무남 청송옹기장의 이야기다.
◆ 60여년 옹기인생의 시작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진안리에 자리한 청송옹기. 길가에 놓인 다양한 모양의 옹기가 낯선 손을 반긴다. 그곳에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25호 청송옹기장 이무남 장인이 산다. 평생 옹기 빚으며 살아온 그의 옹기 인생은 고향인 상주에서 시작됐다.
“고향마을에 옹기공장이 좀 있었어요. 공장 사람들이 점심 먹으러 가고 자리를 비우면 그때 물레 앞에 앉아 어깨너머로 본 것을 흉내 냈지요. 어릴 때 그렇게 옹기를 배웠습니다.”
청송의 흙이 좋다는 소문을 익히 들었던 터라 언젠가는 청송에서 옹기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처음부터 청송에 정착한 것은 아니다.
고향을 떠난 그가 처음 정착한 곳은 영양군 입암면이었다. 지금 청송옹기 자리에서 10㎞나 더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옹기공장이 급매물로 나왔다는 소문을 듣고 입암면으로 찾아갔을 때 그의 주머니에는 돈 1500원이 전부였다.
“1500원이면 요즘 돈으로 한 30만 원 정도 되나요? 아무튼 그 돈으로 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한 식당에 찾아가서 주인에게 동네 유지 분들을 모시고 식사를 하고 싶다고, 있는 돈 전부를 드릴 테니 그 안에서 음식 좀 잘 차려달라고 부탁했지요.”
“그렇게 저녁 한 상 받아 놓고 유지 분들에게 넙죽 큰 절을 올렸습니다. 옹기를 만들고 싶고 옹기공장을 하고 싶은데 돈이 없으니 진심을 다해 도와달라고 했어요.”
우여곡절 끝에 그는 도움을 받아 옹기공장을 인수했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었다. 옹기가마에 불을 땔 장작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역을 오가며 장사를 하는 옹기장사꾼들에게 나무를 좀 대주면 옹기를 빚어서 갚겠다고 하고 땔감으로 쓸 나무를 모았다.
그리고 그가 할 수 있는 대로 옹기를 빚어서 가마를 채우고 불을 땠다. 그렇게 구워진 옹기가 세상의 빛을 보는 날 그의 옹기 인생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처음 옹기 꺼내는 날 사람들이 모여들더군요. 제가 만든 옹기를 보더니 전에 사람보다 더 잘 만든다고 웅성웅성 하더라고요. 그래서 됐다 싶었죠. 낮에는 옹기 만들고 밤에는 동네 돌아다니며 사람들 사귀고 그랬습니다.”
“옹기 굽는 대로 돈이 생겼고, 그동안 빚진 돈은 꼬박꼬박 갚아나갔죠. 없이 살수록 약속을 잘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옹기공장은 그렇게 잘 돌아갔다. 그런데 그의 앞에 영장이 날아왔다. 입대 3일 전이었다. 그는 공장 운영에 관한 것을 깨알같이 적어 누나에게 주고 입대했다.
몸은 군에 있지만 마음은 옹기공장에 있으니 군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가능한 있는 대로 별 수를 다 내어 휴가를 받아냈고 그때마다 옹기공장에 와서 공장을 돌봤다.
하지만 옹기공장은 예전처럼 잘 돌아가질 못했다. 제대 후 공장을 정리하고 직장을 알아보러 다니다 포항 오천에 머무르게 됐다. 그곳에 있는 옹기공장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곳에서 일하면서도 저만의 옹기공장을 하고 싶은 생각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공장에서 대우도 잘 해줬지만 결국 고향을 떠날 때 품었던 꿈을 위해 그곳을 그만뒀어요.”
언젠가는 흙이 좋은 청송에서 옹기를 만들어야겠다는 그 꿈 말이다. 꿈을 따라와 보니 지금의 청송옹기 자리를 찾게 됐고, 1967년 그는 청송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꾸몄다.
◆ 오색 빛깔 흙으로 빚은 꿈
“청송의 흙은 정말 좋습니다. 한 30㎝ 간격으로 붉은색, 파란색, 노란색, 하얀색, 까만색 흙이 쌓여있어요. 전통옹기를 만드는 오색점토입니다. 굴을 파고 들어가 흙을 파내야합니다.”
“비가 많이 오면 굴이 무너지기 때문에 보통 음력설을 지내고 땅이 채 녹기 전에 굴을 파죠. 그러면 잘 안 무너지거든요. 그렇게 1년 동안 쓸 흙을 마련해 둡니다.”
그는 작업할 흙을 모아 놓고 물을 주고 비비고 뒤집는다. 그리곤 다시 물을 주면서 흙이 골고루 물을 먹을 수 있게 한 뒤 흙을 다지고 밟아 이엉을 덮어 놓아둔다.
흙이 물을 잘 먹고 나면 밟아서 차지게 만든 후 흙을 얇게 깎으면서 불순물을 걸러 낸다. 그렇게 흙을 정리하고 나서 옹기를 만들게 된다.
바닥을 만들고 가래떡처럼 길게 뽑은 흙 가락을 올려가며 안과 밖을 두드려 옹기모양을 잡는다. 이때 생기는 각을 깎아 둥글게 만들어 옹기모양을 완성한다.
그 뒤엔 약토(밭이나 산 등에 바람에 날려 쌓인 오래된 흙)와 나무를 태워 만든 잿물을 섞어 저은 다음 천으로 걸러 빠진 앙금으로 만든 천연잿물을 옹기에 바른다.
옹기가마도 그의 손으로 유지되고 있다. 칸막이가 없는 이른바 ‘대포가마’는 100년이 넘은 것이다. 그가 이곳 옹기공장을 인수할 때부터 있었다. 가마는 불기운 때문에 2~3년에 한 번 정도는 보수를 해야 한다. 100년 넘은 가마는 그의 정성으로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가마를 다 채우면 불을 때는데, 보통 일주일 정도 걸린다. 날씨에 따라 길게는 15일 정도 때는 경우도 있다. 처음에는 연기만 날 정도로 때다가 차츰차츰 불을 키운다.
불이 커지고 막바지에 이를 때에는 ‘한불’이라고 해서 온도를 최고로 높이는 큰 불을 땐다. 이때는 가마 안의 온도가 1200도가 넘는다. 그 안에서 옹기는 고무처럼 물렁물렁해진다.
그 열기를 이겨내야만 깨지지 않고 단단한 옹기가 된다. 이 과정을 거쳐 완성된 옹기는 숨을 쉬며, 독을 빨아들이고 정제하는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다.
그는 그렇게 60여 년 간 옹기를 만들었고, 옹기처럼 살아왔다.
쉼 없이 자신을 두드리고 깎고 더 달구며 단단해지도록 했다.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양심을 속이지 않고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다하면 결코 깨지지 않습니다. 그 길에서 누군가 도와주는 사람도 만날 수 있고 말입니다.”
반 백 년이 넘도록 옹기와 함께한 장인. 그가 이야기하는 삶의 이치다.
청송=김희정 기자 shin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