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중학교 1학년 학생들이 자유학기제 활동을 통해 우리 단체에 견학을 와서 사교육 관련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 중에 “도대체 공부를 왜 하는 걸까?”라는 질문에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안 하면 엄마한테 혼나니까요”, “공부 안 하면 친구들보다 뒤처지니까”, “좋은 대학 가려고”, “나중에 잘 살려고요” 등의 답을 내놓았다.
맞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분야에서든 좋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소위 좋은 대학을 나와야 한다. 다른 나라도 학생들이 선호하는 대학에 따라 서열이 있지만 우리나라는 매우 독특하게도 전국의 모든 대학이 SKY, 서성한, 중경외시, 지거국, 지잡대 등의 순으로 신입생 입시성적 순서로 서열화 되어 있다.
서열화 된 대학 체제에서 좀 더 높은 대학을 가기 위해 내신과 수능, 최근에는 봉사활동 등 여러 스펙을 기준으로 친구들과 경쟁하게 된다.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 부모들은 남들보다 일찍, 여건이 안 되더라도 ‘남들만큼은 시켜야 된다’는 불안감에 유치원 때부터 교구수학, 놀이수학, 영어유치원 등 사교육에 자녀를 내몰고 있는 것이다. 실제 지난 6년간 통계청에서 실시한 사교육 실태 조사에서 학부모들이 사교육비를 과도하게 지출하는 이유는 ‘기업 채용 때 학벌을 중시하기 때문’이 부동의 1위였고, ‘특목고, 대학 등 입시에서 점수 위주로 학생을 선발하기 때문’이 2위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부분 국민들이 생각하는 ‘좋은 학교’는 좋은 상급학교를 많이 보내는 학교이다. 좋은 가르침, 행복한 배움이 있는 학교가 좋은 학교라는 것은 교육학 책에서나 나는 이야기이다. 방과 후나 주말에도 밖에 나가지 못하게 통제하고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춘 기숙사형 고등학교가 인기가 있는 이유가 그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좋은 상급학교에 많이 진학하기만 한다면 좋은 학교로 인정되고 그런 학교에 보내기 위해 모두 혈안이 되어 있다.
교사도 마찬가지이다. 얼마나 훌륭한 스승인지는 주로 좋은 상급학교에 몇 명의 학생을 보냈는지에 따라 갈린다. 고교 교사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내가 서울대 몇 명 보낸 교사야’ 등의 자랑 삼은 이야기들을 흔히 들을 수 있다.
교육의 주된 목적이 상급학교 진학이고 이를 위한 경쟁이 당연한 학교 문화에서 승자와 패자를 나누기 위한 시험은 학교 교육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사교육과 온라인 교육이 활성화 되면서 학교의 기능은 ‘출석’과 ‘평가’ 기능만 남았다는 말이 있다. 시험은 학교의 존재 목적이 되어 버렸다. 특히 시험의 요소 중 가르친 내용을 제대로 평가하고 있는지의 ‘타당도’보다 누가 봐도 승자와 패자가 불만을 갖지 않는 평가가 되어야 한다는 ‘객관성’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역사 수업에서 조선 시대에 대해 배우더라도 그 시대 사건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쓰는 시험 문제보다는 그 시대 임금이나 사건의 이름을 고르는 오지선다형 시험 문제를 출제하게 된다. 또 수업은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강의식 문제풀이 위주로 진행되고, 학생들은 관련 서적을 읽기 보다는 문제집 한권이라도 더 푸는 것을 좋은 공부로 생각하게 되었다. 아무리 교과 내용이 재미있고 유익하더라도 오지선다형 평가 문제를 풀기 위한 수업으로 진행되다 보니 수업 내용이 삶과 연결 될 수 없어 학생들은 흥미를 잃고 수업시간에 딴 짓을 하거나 엎드려 자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초중등교육 뿐만 아니라 대학에서도 나타난다. 취업이나 장학금 기숙사에 들어가기 위해 학점에 대한 경쟁이 심해져 상대평가화 되면서 대학에서도 무엇인가를 논하기보다 사실과 지식을 알고 있는 평가들이 출제되고 있다. ‘서울대에서 누가 A+를 받는가’라는 책을 보면, 서울대에서 학점이 높은 학생들은 강의 때 교수의 말을 토시하나 안 틀리고 받아 적고 외운 학생들이었다. 이것은 서울대에서조차 창의적 사고를 묻는 시험보다는 암기를 잘 한 학생이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시험 문제가 출제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대학 교수들의 문제가 아니다. 시험 변별력과 함께 누구도 불만을 갖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보니 그런 문제를 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육과 학교가 본래의 목적보다 신분상승 수단으로써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생기는 이 같은 현상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다. 배움의 공동체로 유명한 일본의 교육학자 사토마나부 교수는 한국, 일본, 중국, 싱가포르 등 동아시아형 교육의 공통적 문제로 보았다. 사토마나부 교수는 동아시아 국가들이 유럽 국가들이 100년 정도 걸린 일들을 불과 몇 십 년 만에 이룩한 ‘압축적 근대화’를 겪으면서 생긴 폐해로 진단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70~80년대 빠른 경제 성장기에 개인에게는 교육이 신분 상승의 수단이었고, 국가적으로는 교육을 통해 말 잘 듣고 열심히 일하는 인력을 양성하여 경제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하지만 문제는 ‘압축적 근대화 시대’가 끝났다는 것이다. 고성장 시대가 끝나고 저성장 사회가 되면서 더 이상 교육이 신분 상승 수단으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2017년 우리나라 전체 실업자 116만 7000명 중 대졸자 이상의 실업자는 전체의 절반에 가까운 46.5%에 이른다. 대학 졸업장, 높은 학벌이 좋은 일자리를 보장해주지 못하게 됐다는 말이다. 국가적으로 봤을 때도 ‘지식을 많이 암기하고 있는 사람’이 더 이상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 시대가 왔다. 4차 산업시대에 창의력과 고등지식은 국가 존립에도 영향을 주는 중요한 요소로 여러 학자들은 미래사회 교육은 더 이상 변별을 위한 지식 암기가 아닌 협력을 통한 자신의 생각을 만드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제 더 이상 교육이 신분상승 수단으로써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교육의 목적 자체가 교육’이 되도록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더 이상 ‘서울대 많이 보내는 학교’가 좋은 학교가 아니라 학생이 다양한 배움과 성장의 기회를 제공하는 학교가 좋은 학교로 인식되어야 한다. 정보력이나 전략을 잘 세워 소위 좋은 대학에 많이 보내는 교사가 좋은 교사가 아닌 학생의 자질을 알아보고 그것을 키울 수 있는 상급학교를 연결해주는 교사가 훌륭한 스승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서울에서 거리에 따라 서열화 된 대학체제는 해체되고 비수도권에 있더라도 좋은 스승과 교육과정이 있는 역량 있는 대학이 명문 대학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또 시험의 목적이 변별이 아닌 학생 성장을 돕는 한가지의 교육 활동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