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어려운 시기가 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감독 임순례)는 몸과 마음이 힘들고 지친 사람들이 찾는 ‘작은 숲’이라는 관념에서부터 시작한다. 주인공 혜원(김태리)은 임용고시에 실패한 후, 자신이 어릴 적 엄마와 살던 집을 찾아온다. 엄마가 떠난 그 집에서 혜원은 식사를 만들고, 밥을 먹고, 밭을 가꾸며 사계절을 보낸다. 최근 영화 개봉을 앞두고 서울 팔판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태리는 “우리 인생에서 한 번쯤, 혹은 여러번 고꾸라지는 시기가 있지만 어떻게든 다시 일어나 추스리고 걸어가야 한다는 것에 대해 관객들이 공감했으면 싶었다”고 혜원을 연기한 소감을 전했다.
“’리틀 포레스트’는 넘어짐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예요. 영화 속에서, 토마토가 비를 많이 맞는 바람에 수확 결과가 좋지 않다는 부분이 있어요. 사실 토마토가 제대로 익지 않아도 우리 인생이 실패한 건 아니잖아요. 그저 그런 일도 있는 일상이 쭉 이어지는 거죠. 혜원이는 아마 그런 것들을 사계절 동안 겪으며 답을 얻었을 거예요. 넘어지는 것도 실패가 아니라 성장의 한 과정이구나, 하는 거요.”
영화 ‘아가씨’이후로 쉼없이 달려온 1년이다. 본인도 혜원과 같은 부침을 겪고, 쉬고 싶었느냐는 질문에 김태리는 “아니오”라고 막힘없이 대답했다. 연기를 하는 삶이 오롯이 스스로 택한 것이며, 여전히 즐겁고 행복하다는 것.
“사람들이 살면서 휴식을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삶에 인이 박혀있을 때인 것 같아요. 내가 하는 일이 굴러가는 메커니즘에 익숙해지고, 삶에 그 일이 반복적으로 박혀서 변화가 없을 때 휴식에 대한 갈망이 생겨난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연극을 할 때부터 연기에 대한 생각이 환했다고 할까요, 정말 긍정적이었어요. 대학로로 가는 길 마저도 행복하고 즐거웠죠. 지금도 마냥 행복하기만 한 건 아닌데, 그래도 여전히 재미있어요. 제가 선택한 삶이잖아요.”
기실 스스로가 선택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혜원의 경우가 오히려 더 흔할 것이다. 큰 생각 없이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안정적인 삶을 위해 대학에 진학해 임용고시를 치지만, ‘너는 뭐가 하고 싶니?’라는 물음을 들으면 바로 답하지 못하는 사람. 그런 혜원을 연기한 김태리는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선택한 삶’이라고 당당히 스스로를 일컬었다. 놀라운 일이다.
“꼭 ‘이걸 해야겠다!’라고 강단있게 살아 왔다기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물 흐르듯이 흘러 왔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아요. 저와 혜원이의 공통점은 독립심이 강하다는 건데, 어떻게 커왔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저는 저 스스로 컸다고 자평 할 수 있는 사람이거든요. 그러다 보니 남의 선택보다는 제가 선택한 것들을 당당히 주장할 수 있게 살아왔어요. 그렇지만 요즘은 또 여러가지 생각이 들어요. ‘정말 이 길이 나의 것인가?’하는 생각도 들죠. 아직 혜원이가 느낀 것만큼의 부침은 없지만요.”
김태리의 장점은 편안함이다. 과장이 없는 편안한 연기를 보며 관객들은 저도 모르게 김태리가 맡은 캐릭터에 빠져든다. ‘어떻게 그렇게 연기할 수 있느냐’에 관해 김태리는 “겁은 좀 없는 것 같다”고 단언했다.
“생각이 많아지면 너무 정신없고 힘들어요. 연기를 하면서 깊이 빠져들기보다는 계속해서 생각을 비우려고 노력하죠. 거기 실패하면 과장되고 목표치에 미달한 연기가 나오는데, 그럴 때마다 처음부터 캐릭터를 다시 생각하려고 한다거나 해요. 관성적으로 연기하는 순간 무너져 버릴 것 같거든요. 아, 그렇지만 과장된 연기가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배우들마다 특성이 있는 거고, 과장된 연기가 잘 맞는 분들이 분명히 있거든요. 그렇지만 제게 맞는 스타일은 아닌 거죠.”
지금의 한국 대중예술계에서 여배우라는 위치는 자극적으로 소비되기 너무나 쉬운 위치다. ‘아가씨’홍보를 할 때만 해도 김태리는 그저 대단히 노출도가 높은 베드신을 찍은 여배우로 소비됐다. 홍보를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입장과 스스로를 지키고 싶은 입장. 두 가지 모두 틀린 말은 아니다. 여자 배우들에게 이같은 줄다리기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지만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김태리의 마음은 어떨까.
“‘아가씨’ 홍보가 진행될 때 제가 했던 생각은 단순했어요. 이거 하고 그만둘 것도 아니고, 제가 숙희 배역으로 영원히 남을 것도 아니잖아요. 그 후에도 이런 역 저런 역 다 만나보고 도장깨기 하듯 일을 해 나갈텐데, 뭐 어때. 지금은 이거 잘 해내고 다음엔 또 잘 하지 뭐. 그런 생각이었고 지금도 같아요.”
“물론 작품만 잘 한다고 다가 아닌 것도 알고 있어요. 이게 맞는 비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팬의 예를 들어보자면 저를 좋아하는 분들이 상상하는 저의 모습이 있긴 하거든요. 그 모습들은 굉장히 단편적이고, 김태리라는 사람의 복잡한 모습을 다 보여줄 수 없어요. 그렇지만 팬들은 그 모습을 좋아하고 김태리의 대표적인 모습인 양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실 때가 있죠. 그런 면에 관해서는 부담이 느껴지기는 해요. 제가 너무 한 가지 모습만 보여드렸나? 하는 거죠. 김태리의 다른 모습을 보여드려야 하나? 꼭 그럴 필요가 없다면, 팬들이 좋아하는 배우 김태리의 모습과 사람 김태리의 모습을 어떻게 분리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이 점점 시작되는 것 같아요.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이은지 기자 onbge@kukinews.com(사진=박효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