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생각은 언젠가 현실이 된다. 어린 시절 학교숙제로 그렸던 ‘미래도시 상상화’는 시간이 흐른 지금 대부분 실현됐다. 상상이 실제로 이뤄지는 동안 사람들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발전했다. 과거에 ‘내 손안의 전화기’를 꿈꿨던 사람들은 이제 다재다능한 인공지능 로봇을 갖고 싶어 한다. 2018년은 그런 시대다.
그런데 유독 생명에 대한 인식은 발전이 없다. 일부는 오히려 후퇴한 듯하다. 이상한 일이다. 지난 24일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위헌 헙법소원에 대한 공개변론을 계기로 ‘낙태죄’ 논란에 다시금 불이 붙었다. ‘태아의 생명권과 사람의 자기결정권’을 두고 격론이 벌어진다. 둘 중 무엇이 우위에 있는지가 주요 논쟁거리다.
문제는 앞서 헌재가 낙태 합헌 판결을 내렸던 2012년과 비교해 논의의 수준과 질 면에서 전혀 달라진 점이 없다는 점이다. 낙태를 처벌하는 법으로 인한 부작용과 고통이 심화됐을 뿐이다. 낙태죄 논의가 수년째 그대로인 이유는 논의의 초점이 잘못됐기 때문이다. 이 지지부진한 논의가 정말 ‘태아의 생명권’ 때문일까. 만약 그렇다면 당연히 발전이 따랐을 것이다. 목표가 분명하면 한낱 아이의 그림도 현실이 된다.
정말 태아의 생명을 중시하는 사회였다면, 어려운 사정에서 홀로 아이를 키운 미혼모는 존경을 받았을 것이다. 생명을 지킨 영웅이기 때문이다. 또 낙태죄 폐지 여부보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지는 많은 아이들을 어떻게 보살필지에 대한 논의가 더 뜨거웠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거꾸로 간다. 미혼모에게는 부정적 인식이 뒤따르고 국가의 지원도 미비하다. 그리고 1980년대부터 수십 년째 ‘입양아 수출국’이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
만일 6년 전 낙태죄 대신 다음 세대를 위한 논의에 불이 붙었더라면, 그 당시 ‘아이들의 행복’을 이야기 했더라면 지금쯤 그 중 절반은 현실이 됐을 것이다.
하루가 빠르게 변화하는 4차산업혁명시대에 언제까지 소모성 논쟁에 국가적인 시간과 노력을 쏟을 것인지 우려스럽다. 국가가 막는다고 해서 낙태를 그만둘 여성은 없다. 과거에도 지금도 낙태를 원해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금 낙태죄가 폐지되지 않는다면 5년 뒤, 10년 뒤에도 같은 논쟁이 계속될 것이다. 그 사이 고통 받는 여성과 불행한 아이들은 더 늘어나겠고, 입양아 수출도 줄어들 리 없다.
2000여년 전 이 땅에 내려온 아기 예수를 생각해본다. 하늘로 올라가면서 사람들에게 다시 오겠다고 약속한 사랑의 신. 예수가 또 다시 마리아의 몸을 빌려 내려올 것이라는 법은 없다. 인간이 감히 예측하기 어렵지만, 전지전능한 신이라면 신의 규칙과 그 시대 상황에 맞추어 가장 적절한 방법을 택할 것임이 분명하다. 어쩌면 산부인과 의사의 인공수정이 그 방법이 될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사랑의 신’이 한 인간의 삶을 파괴하면서 이 땅에 올 리 없다. 무엇이 두려워 낙태죄 존치를 주장하는지 모를 일이다. 신의 전능함을 인간의 굳은 편견으로 가로막는 것 아닌가.
오랜 시간을 들이면 인간의 상상도 현실이 되는 마당에 신의 생각과 계획을 인간이 재단하거나 배려한다는 것은 가당치 않다. 정말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랑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한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제 지지부진한 '낙태죄'에서 벗어나 무궁무진한 상상력과 가능성을 가진 인간, 그녀의 생명과 인생을 고민할 때다.
전미옥 기자 romeok@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