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에는 채플거리에 있는 내쉬 하우스(Nash's House)를 구경했다. 1600년경에 지은 이 집은 셰익스피어의 손녀 엘리자베스 바나드(Elizabeth Barnard)와 그녀의 남편 토마스 내쉬(Thomas Nash)가 살던 집이다. 내쉬 하우스의 오른쪽에 있는 공터는 셰익스피어가 런던극장에서 은퇴한 뒤 죽을 때까지(1597~1616) 살던 집, 뉴플레이스(New Place)가 있던 장소다.
내쉬 하우스에서 조금 더 가면 시청건물이 있다. 찰스 1세의 재위시절 지어진 건물로 1643년 화약폭발로 손상됐다가 1세기 정도 뒤에 재건축됐다. 1946년 담뱃불로 일어난 화재에 무도장이 전소되면서 데이빗 가릭(David Garrick)의 초상화로 유명한 토마스 게인스보로(Thomas Gainsborough)의 소중한 그림들이 소실되고 말았다.
시청에서 조금 더 가면 스트라트포드 어폰 에이븐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선술집으로 알려진 개릭여관(The Garrick Inn)이 있다. 1718년 반목조로 지어졌지만, 이 장소에는 역시 여관으로 사용되던 건물이 있었다고 알려진다. 정확하지 않지만 14세기까지 거슬러 오르기 때문에 이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가운데 하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1912년, 2005년 등 몇 차례 보수가 있었다. 개릭여관이라는 지금의 이름은 1795년 배우 데이빗 개릭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이전에는 그레이하운드(The Greyhound)라고 부른 적도 있고, 레인디어 (The Reindeer)라고 부른 적도 있다.
1564년에 페스트에 걸린 직조견습공 올리버 군(Oliver Gunn)이 여기에서 사망하며 이 마을에 페스트가 시작됐다고 해서, ‘이곳에서 페스트가 시작됐다(hic incepit pestis)’라고 새겨졌다고 한다. 이집에서는 유령이 출몰한다는 소문도 있다.
개릭여관 옆에 있는 건물이 하버드 하우스(Harvard House)다. 이 건물은 1596년 토마스 로저스(Thomas Rogers)가 지었다. 이 집에서 미국 보스턴에 있는 하버드대학의 설립을 후원한 존 하버드(John Harvard)가 태어났다. 토마스 로저스는 성공한 푸주한으로 옥수수와 가축 상인이었고, 셰익스피어의 아버지 존과 함께 시의회 의원을 지냈다.
존 하버드는 1607년에 이곳에서 태어났다. 1625년 마을에 들어온 페스트로 가족 대부분이 죽고 어머니와 동생 토마스만 살아남았다. 존은 케임브릿지의 임마누엘 칼리지를 졸업하고 장관에 임명됐다. 어머니와 동생이 죽은 뒤 존은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목사와 교사로 활동하던 존은 1638년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그가 폐결핵으로 투병할 무렵 매사추세츠만 정착촌(Massachusetts Bay Colony)은 뉴타운에 대학설립을 추진하고 있었다. 존은 요즘 시세로 3백만 파운드에 해당하는 750파운드와 그가 소장하던 책들을 모두 유증했다. 정착촌에서는 그의 뜻을 기려 새로 설립한 대학을 하버드 칼리지라고 명명했다.
드디어 우리는 헨리가(Henry Street)가 있는 셰익스피어 생가에 이르렀다. 이 건물은 1564년 셰익스피어가 이곳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다고 믿어지는 반목조의 2층 건물이다. 오늘날 ‘문학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메카’라고 일컬어지는 곳이다.
집은 아든(Arden) 숲에서 나는 떡갈나무와 윌름코테(Wilmcote)에서 나는 청회색 돌로 지었다. 나무로 뼈대를 세우고 욋가지를 끼워 넣은 다음 석회반죽을 발라 벽을 만들었다. 1층의 바닥에는 돌을 깔았다. 건물의 구조는 비교적 단순하다.
1층에는 벽난로가 있는 응접실이 있고, 커다란 홀로 이어진다. 가죽장갑을 만들던 셰익스피어의 아버지 존이 작업을 하던 방이 있다. 홀에는 2층의 거실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2층에는 셰익스피어가 태어났다고 믿어지는 방을 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집은 뼈대만 원형이고, 1857년에서 1864 년 사이에 진행된 복원사업을 통하여 원형에 가깝게 복구했다. 집 내부에 있는 집기들은 모두 재현해놓은 것들이라고 한다. 요즈음 우리네 살림살이와 비교해보면 적지 않게 불편했을 것 같지만, 당시만 해도 괜찮게 사는 집이었을 것이다.
생가의 내부를 구경하고 문을 나서면 후원이다. 아름다운 꽃이 가득 피어있는데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꽃들은 모두 있다고 한다. 후원에서 흥미로운 조각상을 볼 수 있다. 먼저 셰익스피어와 중국 명나라시대의 문관으로 극작가와 시인으로 유명한 탕현조(湯顯祖, Tāng Xiǎnzǔ, 1550년 9월 24일 ~ 1616년 7월 29일)을 기념하는 청동상이 세워져 있다.
셰익스피어가 탕현조의 다음 세대이기는 하지만 동양과 서양의 대표적 극작가라는 점을 고려한 기념물로 보인다. 그리고 인도의 극작가이자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흉상도 볼 수 있다. 아마도 중국과 인도에서 세운 것이 아닐까 싶다.
생가와 셰익스피어 관련 기념품을 파는 건물 사이에서는 열린 무대가 있다. 무대에서는 배우들이 셰익스피어의 작품 가운데 유명한 장면들을 짧게 구성해 공연하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 본 테마여행에서는 남자 배우가 등장해 햄릿의 유명한 대사를 읊었는데, 이날은 여배우들이 나와서 공연을 했다.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한 정원에 놓인 의자에 앉아 대학시절 연극 동아리에서 활동하던 추억을 되새겨본다. 필자를 연극반으로 끌어들인 작품은 『십이야』였다. 지금의 두브로브니크를 중심으로 한 일리리아를 무대로 벌어지는 희극이다. 타고 가던 배가 난파하여 각각 일리리아에 도착한 쌍둥이 남매를 포함한 두 쌍의 남녀 사이에 복잡하게 벌어지는 사랑싸움이 모두 제 짝을 찾아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그 작품에서는 대학동기가 여주인공의 하나인 올리비아의 시녀 마리아역을 참 맛깔나게 연기했던 기억이 있다. 필자가 연극부에 들어서는 장 아누이의 『안티고네』, 톰 존슨의 『환타스틱스』, 오영진의 『해녀 뭍에 오르다』등 세 작품에 참여한 것이 전부지만, 얻은 것도 많고 잃은 것도 많은 경험이었다. 특히 『해녀 뭍에 오르다』에서는 무대감독을 맡았기 때문에 가장 힘든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남는다.
셰익스피어 생가에서 나와 헨리가의 옛스러운 모습을 구경하다가 3시반 스트라트포드 어폰 에이븐을 떠나 리버풀로 향했다. 리버풀은 아일랜드와 마주한 잉글랜드의 중허리가 잘록하게 들어서 만든 아이리시해를 향한 해안에 있는 항구도시다. 머지강 어귀의 동쪽에 자리한다. 2017년 기준으로 491,500명이 거주하며 광역도시권에는 2011년 기준으로 224만 명이 거주하여 영국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이다.
도시의 이름은 옛 영어에서 탁한 흙탕물을 의미하는 리퍼(lifer)와 물웅덩이 혹은 시내를 의미하는 포일(pōl)을 결합한데서 유래한다. 1190년에 리유풀(Liuerpul)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기록됐다. 1418년에 기록된 레이르폴(Leyrpole)도 리버풀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영국 지명에 관한 케임브리지사전에 따르면 “원래는 물웅덩이와 조석 간만이 있는 시내가 두 줄기로 흘러드는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됐다고 기록돼있고, 1833년에는 ‘리버풀사람의’을 의미하는 리버퍼드리안(Liverpudlian)이란 형용사가 등장했다. 그런가하면, 머지강에 뱀장어가 많이 사는데서 유래한 엘버풀(Elverpool)이라는 이름이 기원이라는 설도 있다.
1207년에 자치구로 지정됐다가 1880년에 도시로 승격됐다. 1889년에는 랭커셔주로부터 독립적인 자치구가 됐다.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원자재를 수입하고 공산품을 수출하는 영국 제1의 항만도시로 성장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대서양을 오가는 노예무역도 이곳에서 이뤄졌다. 19세기에는 세계 물동량의 절반이 리버풀 항구를 거쳐 움직일 정도였다. 커나드(Cunard)와 화이트 스타 라인(White Star Line) 등 세계적인 해운사가 리버풀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1960년 이 도시에서 결성된 록밴드 비틀즈가 1970년 해산하기까지 세계적인 명성을 얻으면서 리버풀은 관광도시로도 성장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