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MeToo) 운동은 2017년 미국 영화계의 거장인 하비 화인스타인의 성추문 사건을 사회연결망서비스(SNS)에서 폭로한 영화배우 알리사 밀라노가 여성들에게 여성혐오나 성폭행 등 감추기만 했던 경험을 공개해 사회적으로 만연한 문제를 표면으로 드러내도록 독려한 행동에서 촉발됐다.
국내에서도 미투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현직검사가 검찰 내에서 만연한 성추행 문제를 드러낸데 이어 연극계와 영화계 등 문화·예술계를 거쳐 정치계로까지 번지며 사회를 흔들었다. 그리고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일부나마 사람들의 공감을 얻으며 사회의 썩은 부위를 조금은 도려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 많은 부분에서 성숙하진 못한 듯하다. 적어도 보건의료계, 더 좁혀서 간호계에서는 미투운동의 근간으로 풀이되는 용기 있는 표현과 드러냄이 여전히 부족해 보인다. 공공연한 비밀이 된 의료기관 내 감염이나 간호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태움에 대해 보건의료계와 간호계는 침묵할 뿐이다.
1회용품이라고 명명된 치료재료가 수술실이나 의료기관에서 공공연히 재사용된다. 물론 1회용이라고 불리지만 현실적으로 1번만 사용하고 버릴 수 없거나 세밀한 소독과 멸균작업으로 재사용이 가능한 의료용품들도 있다. 미투를 지배하는 의식에 의하면 이런 문제는 드러내고 알려야할 것이다. 하지만 의사나 간호사들은 감추기에 급급하다.
한 의사는 “1개에 수십만원인 1회용 치료재료를 1번의 수술에 수개씩 사용한다. 그 비용만 백만원을 훌쩍 넘는다. 철저히 소독한다면 다시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을 1회용이라는 잘못된 구분 때문에 환자나 의료기관에게 온전히 부담하라고 한다면 받아들이겠느냐”면서 “1회용품에 대한 재분류가 필요한 실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일련의 사실을 드러낼 수는 없느냐는 질문에는 “현재 1회용품으로 분류된 만큼 재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감염문제로 세상 시끄러운 상황에서 의료계에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며 보도를 자제해주기를 요청하기도 했다. 심지어 관련 학회에서는 “입장을 밝힐 수 없다”며 공공연한 1회용 의료용품의 재사용 문제에 대한 답변을 거부했다.
간호사들 사이에서 ‘태움’으로 통하는 악습도 마찬가지다. ‘잡념과 사견을 없애 최소한 환자를 배우고 익힌 데로 기계적으로 대할 수 있도록 정신을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의미를 가진 간호사들의 후배교육에 대한 문제가 한 간호사의 어리석은 선택으로 보건의료계 현안으로 떠올랐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문제를 밖으로 드러내길 꺼리는 모습이다.
고인이 된 박선욱 간호사가 근무하던 서울아산병원은 최근 신규 간호사 채용면접 과정에서 한 면접관의 질문으로 곤혹을 치렀다. 중간에 중단되긴 했지만 일부 면접대상자들에게 한 면접관이 ‘올 초 병원에서 일어난 안타까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힘든 신규 생활을 어떻게 버틸 것이냐’, ‘학교 선배가 자살한 병원인데 왜 지원했느냐’ 등의 질문을 던져서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고 박선욱 간호사 사망사건 진상규명과 산재인정 및 재발방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비롯해 ‘간호사연대’, ‘행동하는 간호사회’ 등 간호사 단체들은 ‘몰상식한’, ‘비윤리적인’, ‘갑질횡포’, ‘파렴치한’ 등의 단어를 사용하며 병원과 면접관에 대한 비난을 쏟아냈다. 박 간호사의 죽음을 모독하고 유족을 욕보이는 천인공노할 행태라는 지적이다.
병원은 면접과 관련된 비난여론이 거세지자 언론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 면접관의 질문에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하며 사과의 말을 전했다. 그렇지만 그 이전에 면접관의 질문은 잘못된 것일까. 분명 망자에 대한 비난이나 명예훼손을 의도한 질문이었을까. 아산병원의 해명처럼 면접자들의 위기에 대응하는 방식에 대한 질문은 아니었을까.
실제 일부 사기업들의 경우 ‘압박면접’이라는 형식을 통해 곤혹스러운 상황이나 어려운 질문을 연이어 몰아치며 면접자의 위기대처능력이나 위기에 대한 인식정도, 이를 대처방식에 대해 알아보고 선발에 반영하는 경우들이 있다. 심지어 억울함과 답답함에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는 평이 수두룩한 기업들도 존재한다. 이들의 면접방식은 잘못된 것일까.
최악의 상황에서 그 사람의 근본이 나온다는 말이 있다. 방식이나 표현, 의도의 문제는 있겠지만 극한으로 몰린 상황에서 평소엔 보이지 않는 내면의 모습이 비춰지는 것은 사실이다. 면접은 사람을 판단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압박면접 등은 천편일률적인 답변이나 꾸며진 이력서만으로는 면접자를 판단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나온 방식이다.
더구나 태움은 공공연하지만 감춰진 악습이다. 섞어 곪은 부위를 짜내지 않으면 점점 섞은 부위가 넓어질 뿐이다. 미투운동을 통해 사회가 변하고 있는 것처럼 태움 또한 드러내고 고통스럽지만 곪은 부위를 짜내는 치료과정이 필요하다. 덮어놓고 몰상식적이며 비윤리적인 망자를 욕보이는 행동이라며 비난할 것이 아니라 문제를 표면화시키고 직시하며 풀어가야 할 것이다.
성숙한 사회의 일원이라면 감정과 이성을 분명히 가려낼 수 있을 것이다. 미투를 지지하면서도 미투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역차별과 오남용에 따른 사회적 낙인과 같은 부작용을 걱정하고, 혹시나 선의의 피해자가 발생하지는 않을지 돌아보고 신중할 수 있는 이성적 판단, 성숙한 의식이 우리 사회에도 충분히 자리잡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믿고 싶다. 믿고 있다.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