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영문학 기행] 열여섯 번째 이야기

[양기화의 영문학 기행] 열여섯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8-09-11 12:01:37


벨파스트시청의 정원은 넓기도 하고 나무가 우거져있어 주변의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잘 모이는 장소다. 벨파스트 시청의 서쪽 정원에는 벨파스트 세노타프(Belfast Cenotaph)라고 부르는 기념비와 추모의 정원으로 된 전쟁기념관이 있다. 시청을 설계한 알프레드 브룸웰 토마스경이 설계해 1929년 공개됐다. 

기념관의 중앙에는 포틀랜드섬의 돌로 만든 9.1m 높이는 기념비가 서 있다. 기념비 맨 위에는 승리와 명예를 상징하는 월계수가 새겨져 있다. 기념비의 북쪽 면에는  “PRO DEO / ET / PATRIA // ERECTED BY / THE CITY / OF / BELFAST / IN MEMORY OF / HER / HEROIC SONS / WHO MADE / THE SUPREME / SACRIFICE / IN / THE GREAT WAR / 1914–1918 // THROUGHOUT THE LONG YEARS OF STRUGGLE WHICH / HAVE NOW SO GLORIOUSLY ENDED THE MEN OF ULSTER / HAVE PROVED HOW NOBLY THEY FIGHT AND DIE / GEORGE R.I.”라고 적혀 있다. 

“하나님과 조국에게. 1914년부터 18년까지의 위대한 전쟁에서 숭고하게 희생된 그의 영웅적인 아들들을 기억하며 벨파스트시를 세웠다. 오랜 세월 끝에 지금은 영예롭게 마무리한 노력을 통해 얼스터의 남자들이 얼마나 훌륭하게 싸웠고 죽었는지 증명됐다. 조지 R.I”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남쪽 면에는 “THEY DEDICATED THEIR LIVES TO A GREAT CAUSE AND THEIR ACHIEVEMENTS BY LAND, SEA AND AIR WON UNDYING FAME”라고 적혀있는데,  “그들은 위대한 동기와 대지와 바다와 대기를 얻기 위하여 생을 바쳤고, 불멸의 명예를 얻었다.”라고 풀이된다. 

기념비의 남쪽 뒤에는 7.6m 높이의 한 쌍의 코린트양식의 기둥이 반원형으로 감싸는 열주가 있고, 북쪽으로는 계단을 내려가 회상의 정원을 꾸며놨다. 1929년 기념관을 제막한 뒤로 매해 11월 둘째 일요일인 현충일과 솜므전투가 시작된 7월 1일이면 재향군인회에서 꽃을 바친다. 

벨파스트 시청의 정원에 흩어져 있는 다양한 기념물을 담느라 가이드의 설명에 집중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우리 가이드는 한국전에 참전한 북아일랜드 병사들을 기리는 임진강 전적비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한국산 화강암으로 된 2단 주춧돌 위에 오벨리스크를 세운 형태의 전적비는 채궁현(Chaegunghyon)의 해피밸리 전장(Battle of Happy Valley)에 세워졌는데, 1962년 북아일랜드 발리메나(Ballymena)에 있는 로열 얼스터연대(Royal Ulster Rifles)로 옮겼던 것을 2008년 병영이 폐쇄되면서 벨파스트 시청으로 옮겨진 것이라고 했다. 

채궁현이라는 지명이 생소했는데 국방부 블로그에 ‘해피밸리전투’에 대한 기록이 있었다. 미국이나 영국의 전사는 물론 당사국인 우리나라의 전사에도 기록을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해피밸리전투’는 ‘고양전투’라고도 하는데 1.4후퇴를 앞두고 서울시민을 엄호하기 위해 서울 북방에 배치된 영국 얼스터 대대가 1951년 1월 3일 밤 기습해온 중공군에 포위돼 부대대장 이하 157명이 전사한 비극적인 전투다.

로열 얼스터 연대는 1793년 북부 아일랜드에서 창설된 유서 깊은 부대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솜므전투에서도 용맹을 떨친바 있다. 오열 얼스터연대는 한국전쟁에 1개 대대병력을 파병해 영국군 29여단에 소속됐다. 로얄 얼스터 대대 본부가 자리를 잡은 곳은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의 곡릉천 근처, 교외선이 지나는 철로변이었다. 

벨파스트 임진강 기념비 관련 글에 나오는 채궁현이라는 지명은 얼스터 대대본부가 사용하던 쟁고개 입구에 있는 제궁현(濟宮峴) 터널이라는 기차터널의 이름을 영어로 옮길 때 생긴 착오 같다. 양주시 장흥면 삼상리 마을의 옛 이름이 제궁동(濟宮洞)인데, 일영에 있는 내시촌에 가까워 은퇴한 내시나 상궁들이 거처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얼스터대대가 전멸한데는 인접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부대와의 협조가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은데 기인했던 모양이다. 한밤중에 철수를 시작한 얼스터 대대의 머리 위로 미공군이 투하한 조명탄이 떨어지면서 작전 중인 얼스터대대의 움직임이 중공군에 노출됐고, 집중공격을 받았던 것이다.

위기의 순간에 달려와 도와준 북아일랜드 얼스터대대 병사들의 비극적인 최후를 새긴 전적비를 그대로 뒀어도 기억할 사람이 많지 않았을 터인데 그마저도 벨파스트로 보내버린 것은 무슨 이유였는지 궁금하다. 중공군이 자국 전사자들만 수습해서 서울로 향하자, 마을사람들이 나서서 얼스터대대 전사자들을 수습해 묻었다. 

3월이 되면서 중공군들이 물러나고 얼스터대대가 다시 돌아왔다. 그들은 메네미 고개의 북쪽 산록에 집단 묘역을 조성하고 전사자들을 발굴해 이곳에 모두 합장했다. 묘역이 조성되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다음, 얼스터 대대장 칼슨 중령은 인근의 한 석물 공장에서 분홍빛 나는 화강암을 발견하고 묘비를 만들기로 했다. 묘비의 제막식에는 많은 영국군과 마을 주민들이 참석했다. 

1956년 매네미 고개 묘역에 안장된 유해를 부산의 UN군 묘역으로 이장하면서 묘역에는 추모비만 남았다. 그리고 얼마 뒤 추모비가 파손돼 넘어진 채로 발견됐다. 마을 사람들은 묘역을 밭으로 만들려는 누군가의 소행이 아니었을까 추측했다. 공병대가 나서서 산을 평평하게 다듬어 만든 묘역은 밭으로 해도 좋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추모비는 시멘트를 넣어 튼실하게 세워졌던 것으로 무심하게 넘어질 리가 없었을 터다. ‘영국 사람들이 알면 한국인들을 보고 은혜를 모르는 인간들이라고 할 것’이라고 걱정한 마을 사람들이 재건을 추진했다. 하지만, 면사무소에서는 경비문제도 그렇고 영국의 소유인 추모비는 영국이 알아서 처리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는 것이다. 

몇 년간 넘어진 채 있던 추모비는 1962년 영국대사의 건의에 따라 순양함 벨파스트를 타고 로열 얼스터연대 병영으로 옮겨졌다. 연대가 폐쇄되고 추모비가 있던 땅이 부동산 개발업자에게 팔리면서 벨파스트 시청으로 옮겨졌다. 이때 북아일랜드에 공장이 있던 삼성전자가 이전비용을 일부를 찬조했다고 한다. 그나마 체면을 세운 것 같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아일랜드와 한국 수교 30주년에 즈음해 에몬 맥키 주한 아일랜드 대사가  해피밸리 전투의 추모비 건립을 추진했다. 아일랜드가 해피밸리 참전 영국군 얼스터 대대원들을 추모하는 것은 해피밸리에서 전사한 얼스터 장병들의 절반이 이중국적자로서 영국 국민이면서 아일랜드 국민이기도 해서이다. 

1921년 12월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아일랜드는 같은 섬의 북아일랜드 영국 주민들에게는 이중국적을 부여해왔다. 2013년 5월 22일 우리나라 국방부의 협력으로 해피밸리에서 성대한 추모식이 열렸고 다음날 전쟁 기념관에서 추모비의 제막식을 가졌다. 이야기가 여기에 이르면서 마음이 조금은 개운해진다. 

벨파스트 시청을 방문하는 일정을 가진 여행사 가이드는 꼭 임진강 전투 기념비에 대해 조금 더 상세하게 설명해주면 좋겠다. 그리고 파병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극동의 한국 사람들의 안녕을 위해 장렬하게 산화한 얼스터 대대 장병들을 위해 같이 묵념을 올리자면 반대할 사람들이 있을까?

4시 반 벨파스트 시청을 떠나 더블린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벨파스트를 소개하는 것을 잊었다. 벨파스트는 아일랜드섬에 있지만, 영국에 속하는 북아일랜드의 수도이며, 2017년 기준 34만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도시지역에는 2016년 기준 48만명이, 대도시지역으로 넓히면 2011년 기준 67만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 북아일랜드에서는 가장 크고, 아일랜드섬에서는 더불린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다. 

벨파스트라는 도시 이름은 아일랜드어 벨 알레르데(Béal Feirsde)에서 유래해 벨 파스트(Béal Feirste)가 됐다. 벨(béal)은 입(mouth) 혹은 하구(rivermouth)를 의미한다. 피사이드(fearsaid)는 모래톱 혹은 얕은 물을 의미해 ‘모래톱의 입’을 뜻하는 단어라 할 것이다. 여기서 모래톱은 도네갈 부두가 있는 곳으로 라간(Lagan)강과 그 지류인 파르셋(Farset)강이 만나 형성한 것이다.

도시 인근에 자이언트 링(Giant's Ring)이라고 하는 5000년쯤 되는 환상유적(henge)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 시대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역시 철기시대의 유적들도 주변 언덕에서 발견된다. 12세기 들어 존 드 쿠시(John de Courcy)가 벨파스트 곳곳에 성을 지은 것을 보면 규모가 되는 마을로 발전했던 것 같다. 

아더 치체스터(Arthur Chichester)경이 중심이 되면서 17 세기경 도시는 상당한 규모에 이르렀다. 18 세기와 19 세기에는 린넨, 로프 제작, 중공업 및 조선업 등의 산업이 번창해 아일랜드의 독보적인 산업도시가 됐다. 1921년 아일랜드가 독립하면서 종교적 차이로 인해 북아일랜드가 영국의 지배로 남게 되면서 벨파스트는 북아일랜드의 주도가 됐다.

벨파스트시청에서 동쪽으로 사거리를 두 개쯤 가면 치체스터가와 몽고메리가가 만나는 사거리에 벨파스트에서도 손에 꼽는 펍 ‘개릭(The Garrick)’이 있다. 몽고메리가쪽의 벽에는 “A Nation that keeps one eye on the past is wise. A Nation that keeps two eyes on the past is blind.”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직역하면 ‘한 눈으로 과거를 보는 나라는 현명하다. (하지만) 두 눈으로 과거를 보는 나라는 결국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로, 현명한 나라는 한눈으로는 과거를, 또 다른 눈으로는 미래를 직시한다는 말이다. 즉, 과거에 매몰돼 있는 나라는 미래가 없다고 할 것이다. 작금의 우리 사회에 던지는 경구가 아닐 수 없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수석위원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8 동 기관 평가수석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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