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라는 단어가 대중매체에 등장한지도 약 15년이 지났다. 2002년 방영된 드라마 ‘겨울연가’를 필두로 전세계에 분 한류 바람은 이제 단순한 한국 드라마 유행을 넘어서 한국의 대중문화, 나아가 한국 자체를 소비하는 것으로 바뀌고 있다. ‘국뽕’에 취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해외의 ‘신한류’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을까. 그리고 세계인들이 말하는 ‘한국적인 것’은 무엇일까.
# 10년 전엔 ‘니뽄삘’… 이제는 ‘칸코쿠 스타일’
일본에서 가장 잘 팔리는 잡지는 여자 중고생을 대상으로 하는 패션 잡지 ‘세븐틴’ ‘앙앙’등이다. 해당 패션지들의 표지에서는 드물지 않게 한국 아이돌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까지는 단순히 한류 가수 붐에 편승한 단발성 표지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표지들에 장식되어 있는 기사 목록을 보면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인기있는 한국 여고생 스타일’ 혹은 ‘한국 메이크업 스타일’ 등의 기사가 심심찮게 게재돼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다. 잡지들을 펼쳐 보면 한국의 쇼핑몰 화보 등과 다른 점을 찾기 어렵다. 한국에서 유행하는 메이크업을 재현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여성들이 입는 스타일의 옷들을 나열하고 코디했다. 최근 발매된 일본의 패션잡지 ‘팝틴’ 10월호를 살펴보면 걸그룹 트와이스 멤버를 따라하는 메이크업부터 한국의 유명 쇼핑몰인 ‘츄’ ‘스타일난다’ ‘핫핑’ ‘소녀나라’ 등이 표지에 기재돼 있다.
2018년도 일본의 여고생-여중생 핫 트렌드 단어 목록을 살펴보면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 공차와 틱톡, 공차가 5위 안에 들어있다. 10년 전까지 한국에서 ‘니뽄삘’ 패션이 유행했던 것과는 비교도 안되는 ‘한국 붐’이다. 단순히 한류를 즐기는 것 이상이 아니라, 일본의 젊은 세대가 한국 그 자체를 탐독하고 있는 것이다.
# 한국 탐닉하는 세계…. ‘한국적인 것’의 기준이 달라졌다
최근 미국의 대표 편의점 ‘듀안 리드’, 마트 브랜드인 ‘타겟’등에는 거의 대부분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K뷰티’ 코너가 마련됐다. 불과 몇년 전만 해도 미국 현지에 맞춰진, 한국 브랜드 흉내만 내는 뷰티 상품들이 입점돼 있었으나 지금은 다르다. 한국에서 대중적으로 소비되는 브랜드부터, 중소기업 브랜드까지 다양한 화장품과 마스크팩 등이 팔리고 있다. 특히 ‘1일 1팩’의 경우 한국식 피부미용 방법으로 불리며 현지 여성들에게 인기를 누린다. 한국 제품을 직접 수입해 내놓고 있음은 물론이다.
베트남과 태국의 경우 한류 붐이 일다 못해 최근 한류에 편승하는 ‘짝퉁’ 한국 브랜드 ‘무무소’가 판쳐 자국 정부가 직접 나서 단속 중이다. 중국 브랜드임에도 불구하고 자사 홈페이지에까지 ‘한국 회사’라고 기재하며 한국의 이미지에 기대어 판매하는 전략을 내세운 것이다. 그러나 그 제품의 질이 한국 브랜드에 못 미치는 데다 표시 규정을 위반해 태국 경찰청 경제범죄부(ECD)와 소비자보호부(CPPD)는 최근 태국 내 무무소 매장 7곳에 대한 일제 단속을 실시하기까지 했다.
# ‘전통’과 ‘한국적’이라는 함정에 빠진 한국… 문화는 변화한다
그런데 막상 한국에서 전통 문화, 혹은 한류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들은 아이러니하다. 예를 들면 ‘전통 한복’ 논란이 그렇다. 삼청동, 서촌, 효자동 일대를 돌아다니다 보면 한복풍의 대여 의상, 즉 ‘퓨전 한복’을 입은 채 돌아다니는 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한복을 입고 싶어하는 관광객들과 종로구청의 한복 착용자 고궁 무료입장 정책이 맞물려 만들어낸 광경이다.
서울 종로구청은 지난 11일 ‘한복 토론회’에서 여태까지와 다른 정책을 내놨다. “전통 한복이 아닌 퓨전 한복 착용자에게 고궁 무료입장 혜택을 제한한다”는 것이다. 시행 취지는 국적이 불분명한 퓨전 한복이 우리 한복 고유의 전통성을 훼손한다는 데 있으며, 종로구청은 문화재청에 이같은 건의사항을 내놓겠다고 전했다. 반발은 의외로 거셌다. 여태까지 퓨전 한복을 입고 고궁을 즐겨 찾던 젊은이들부터, 한복이 가득한 풍경을 즐기던 시민들까지 반대한 것이다. 지금도 해당 기사 댓글에서는 ‘전통 존중’과 ‘시대착오적’이라는 의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이른바 ‘퓨전 한복’도 옷고름과 끝동, 스란치마 등이 모두 섞여 있다. 통상적으로 이야기하는 조선시대 한복의 특징은 모두 갖추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서양식 레이스와 금박으로 뒤덮여있기 때문에 해당 대여 의상들은 ‘전통 한복’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시대착오적’이라는 시민들은 ‘고유의 것’이 대체 무엇인지부터 점검해 볼 필요성이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복 토론회’가 열린지 불과 일주일도 안된 시점인 지난 17일. 서울 동대문디자인 플라자에서는 서울시 산하의 서울디자인재단이 주최한 ‘궁 나들이’ 패션쇼가 열렸다. 서울 소재 패션학과에 재학중인 대학생 100여명이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한복을 내놓은 쇼로, 먼저 열거한 ‘퓨전 한복’에 속하는 리본이 잔뜩 달린 한복이나 레이스가 달린 한복 등도 포함됐다. 전통 한복과, 나아가 ‘한국적인 것’을 둘러싸고 종로구청과 서울시가 반대되는 입장을 내놓은 것이다.
시대를 따라 문화는 변화하기 마련이다. 종로구청과 서울시의 사뭇 다른 행보 또한 문화가 변화하는 시기의 과도기에서 일어난 해프닝이라고 볼 수 있다. 고려 시대의 한복과 조선 시대의 한복이 그 양식이 다르다 해서 한 쪽은 한복이 아니지는 않다. 다만 지금 시점에서 ‘가장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지 분명 점검해 볼 필요는 있다. 김치와 불고기보다 ‘강남스타일’이 한국 문화로 꼽히는 시대. 전 세계가 한국 그 자체를 즐기고 있는 지금, 닫힌 시각으로 전통을 고집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이은지 기자 onbg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