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린에서 출발한 페리가 도착한 홀리헤드(Holyhead)는 벨파스트로 가는 페리를 탔던 케언리언(cairnryan) 항구와는 달리 규모가 꽤 큰 마을이다. 케언리언이 단순히 도항기능만을 하는 항구였다면 홀리헤드는 물류가 같이 움직이는 항구가 아닐까 싶다. 우리는 콘위(Conwy)로 향했다.
콘위로 가는 길에 웨일스의 앵글시 섬에 있는 세상에서 가장 긴 이름을 가진 마을에 잠시 들렀다. 웨일즈어로는 51자에 달하는 ‘Llanfairpwllgwyngyllgogerychwyrndrobwllllantysiliogogogoch’라고 쓰고 ‘흘란바이르푸흘귄기흘고게러훠른드로부흘흘란더실리오고고고흐’라고 읽는다. 역 이름 말하다가 기차를 놓칠 수도 있겠다. 그래서 흘란바이르푸흘귄기흘(Llanfairpwllgwyngyll)로 줄여 쓴다. 이름의 유래는 영국에서 가장 긴 기차역 이름을 가지려고 마을의 재단사가 일부러 지은 것으로, ‘붉은 굴의 성 터실리오 교회와 물살이 빠른 소용돌이 가까이 있는 흰색 개암나무의 분지의 성 마리아 교회’라는 뜻이다.
가이드는 이곳이 세상에서 가장 긴 이름을 가진 마을이라고 했지만, 기네스북에 올라있는 세상에서 가장 긴 마을 이름은 뉴질랜드 북섬에 있다. 마오리어로 된 이름을 영어로 옮기면 85자나 되는 ‘Taumatawhakatangihangakoauauotamateaturipukakapikimaungahoronukupokaiwhenuakitanatahu’다. 우리말로는 ‘타우마타와카탕이항아코아우아우오타마테아투리푸카카피키마웅아호로누쿠포카이웨누아키타나타후’라고 발음하는데 45자나 된다. ‘타마테아라는 큰 무릎을 가진 등산가가 여행을 하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피리를 불었던 정상’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줄여서 타우마타(Taumata)라고 부른다.
이름이 긴 마을에서 잠시 버스를 내려 인증사진을 찍고는 다시 출발한다. 이름이 길다는 것 말고는 특별한 것이 없는 동네였다.
길을 가다보니 다리 아래로 작은 섬이 하나 보이고 그 섬 위에 집 한 채가 동그마니 올라앉아 있다. 오래 전에 토론토에서 오타와로 여행하면서 지났던 구경한 사우전드 아일랜드 (Thousand Islands) 생각이 났다. 온타리오 호수에서 대서양으로 흐르는 세인트 로렌스 강 안에 1864개의 섬이 흩어져 있는데, 100㎢ 넓이에서 정말 집 한 채만 달랑 올라앉은 작은 섬까지 다양하다.
그때도 홍수가 나면 어떻게 하나 궁금했었던 것처럼 여기에서도 같은 궁금증이 일었다. 하지만 이 섬은 사우전드 아일랜드와는 달리 강이 아니라 바다에 떠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한다. 즉 앵글시(Anglesey)섬과 웨일즈 사이의 좁은 해협에 있는 섬이다. 쓰나미라면 문제가 되겠지만, 홍수 때문에 집이 잠길 일은 없단다. 다만 이집에 가는 길이 불편한 우체부는 엄청 싫어한다는 집이다.
콘위 가까운 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웨일즈 북쪽 해안의 콘위강의 하구에 위치한 콘위는 2015년 기준으로 4065명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마을 이름은 오래된 웨일즈어로 수석을 의미하는 젠(cyn)과 물을 의미하는 그위(gwy)가 합쳐 생겼다. 이 마을이 여행자들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면서 ‘13세기 후반과 14세기 초반의 유럽 군사건축을 대표할 사례’로 든 것처럼 비교적 잘 보존된 성곽과 요새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콘위성은 성벽과 성루는 물론 전체 성곽이 비교적 잘 유지되어 있고 바닷가까지도 연장한 성벽이 이채롭다. 이 성은 아일랜드로 쫓겨난 켈트족의 침공을 대비한 것이었는데 스노더리안산맥으로 인해 유용성이 떨어지면서 방치되었던 것이라 한다. 성벽과 곳곳에 세운 성탑이 성을 방어하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곡물을 보관하던 창고로 보이는 깊은 우물 같은 구조도 흥미롭다.
콘위성은 웨일스를 점령한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의 명으로 1283년부터 6년여에 걸쳐 건설되었다. 마을을 에워싸는 성벽과 함께 콘위강 어귀를 지키는 요새가 세워졌다. 최초에는 아일랜드로 쫓겨난 브리튼 켈트족의 침공에 대비한 것으로 당시로는 막대한 1만5000파운드가 소요됐다.
직사각형 모양의 요새는 현지와 해외에서 구한 돌로 지었다. 안마당과 바깥마당으로 나뉘어졌고, 외부를 감시하기 위한 8개의 탑과 2개의 망루를 세웠다. 강으로 연결되는 통문이 있었으며, 바다에서도 보급을 받을 수 있었다.
켈트족은 콘위성의 존재보다는 가까이 있는 스노도니아(Snowdonia)산맥의 험준한 지형 때문에 웨일즈에 돌아오지 못했다. 스노도니아는 웨일스어로 에리(Eryri)라고 부르는데, 독수리를 의미하는 웨일스어 에르(Eryr)에서 온 것으로 ‘독수리의 땅’이라는 의미이다. 1951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될 만큼 수려하며 최고봉은 1085m이다.
이처럼 콘위성은 켈트족의 재침과는 별다른 연관이 없었지만, 이후 몇 세기에 걸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면 1294년에 일어난 웨일스 반란군이 성을 포위하였을 때, 에드워드 1세는 몇 달을 버티다가 바다를 통해 요새로 합류한 해군에 의해 구출됐다. 1642년 청교도혁명 당시에는 찰스1세와 왕당파의 피신처가 됐다. 1646년 의회파가 성을 점령한 다음에는 성은 방치됐다가 1665년 완전히 파괴됐다. 18세기 후반부터 콘위성은 화가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하면서 19세기 후반 복원작업이 시작됐다.
콘위성의 안마당을 지나 나선형 돌계단을 통해서 망루에 올라서면 성채 내부의 구조는 물론 성 밖 풍경까지도 한 눈에 들어온다. 성 밖 마을을 빙 둘러 감싸고 있는 성벽은 바닷가로 연장돼있다. 성벽 위로는 성을 지키는 군사가 왕래했을 것으로 보이는 통로가 만들어져있고, 깊은 우물처럼 생긴 곳은 곡물을 보관하던 창고로 보인다. 퇴색한 성벽, 모서리가 닳은 망루가 기나긴 세월의 흔적을 드러낸다.
영국의 사회사상가 존 러스킨은 <건축의 일곱 등불>에서 설파한 건축의 일곱 가지 원칙 가운데 ‘기억’을 최고로 꼽았다. 그 이유는 이렇다.
“건물의 가장 위대한 영광은 돌이나 금과 같은 재료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영광은 건물이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에 달려 있고 말하고자 하는 바의 울림과 엄밀한 관찰의 깊이에 달려 있으며, 또한 찬성이나 비난이 교차하더라도 인간애의 물결로 오랫동안 씻긴 그 벽을 보며 우리가 느끼는 불가사의한 공감에 달려 있다. 오랜 시간을 견뎌온 그 증인이 인간을 마주할 때, 그리고 잠시 머물다 가는 모든 사물과 조용히 대비를 이룰 때 영광이 있다.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지나며 왕조의 탄생과 쇠퇴가 반복되고 지구의 표면과 해안의 경계가 바뀔지라도, 거기에 있는 돌은 그 고된 시간 동안 자신의 모습을 유지하며 잊힌 시대와 다가올 시대를 서로 연결하고 공감을 이끌어내는, 그래서 이미 그 민족 정체성의 절반을 구현하는 힘의 크기 안에 그 영광이 있다.(241쪽)”
유구한 세월의 흔적으로 마모되거나, 낙엽이나 심지어는 이끼가 덮여 자연과 동화되어가는 모습에서 건축물의 존재의 의미가 빛을 발하는 것이다.
흔히 영국은 앵글로색슨족이 지배해왔다고 생각하지만,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민족들이 명멸했다. 빙하기가 끝나고 다양한 민족들이 브리튼섬으로 이주해 살았는데, 그 가운데 켈트족은 기원전 6세기 무렵 등장한다. 통일된 왕조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부족장을 중심으로 한 계급사회를 이뤘다. 그들은 나름대로는 상당한 수준의 기술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켈트족 사회에는 드루이드라고 하는 독특한 존재가 있었다. 흔히 사제의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드루이드는 20여년에 이르는 긴 수련기간을 통해 다양한 분야의 지식과 기술을 연마하는 한편 영적 수련을 받았다. 그들은 켈트 부족사회에 축적된 지식 자체로 부족장의 자문역을 하였을 뿐 아니라 그 지식을 다음 세대로 넘겨주기 위한 교육자이기도 했다.
브리튼 켈트족의 시련은 로마제국의 침공으로 시작되는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전쟁(기원전 58~51년) 당시 브리튼 켈트족이 갈리아를 도와줬다고 해서 전후에 브리튼섬을 침공했던 것이다.
한 세기가 지난 뒤 클라우디우스황제가 브리튼 남부를 점령해 속주로 삼은 뒤로 1세기말 도미티아누스황제 시절에는 스코틀랜드지역으로 영역을 넓혀 410년 철수할 때까지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기민하고 적응력이 뛰어난 브리튼 켈트족은 로마의 문화를 받아들여 발전된 로만-브리튼 문화를 만들어냈다.
훈족의 침략과 내전으로 궁지에 몰린 로마제국이 브리튼에서 철수한 뒤로 지금의 덴마크, 독일, 네덜란드 등 유럽대륙의 북부해한 지역에 살던 앵글로-색슨족이 브리튼섬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브리튼섬의 지배를 둘러싼 브리튼 켈트족과 앵글로색슨족의 충돌이 7세기 무렵 앵글로-색슨족의 승리로 끝이 났다. 아서왕의 전설은 브리튼족과 색슨족이 충돌하던 시절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브리튼족은 웨일즈, 콘월 지방으로 밀려났고, 일부는 프랑스 북부로 건너가 브르타뉴 공국을 건설했다.
콘위성은 앵글로 색슨족에 밀려 아일랜드로 쫓겨간 켈트족이 돌아올 것을 걱정한 색슨족이 쌓은 방위선이었다. 지금은 관광지로 주목받고 있는데 강어귀에 늘어선 배들을 보면 해양스포츠가 활발한 모양이다. 콘위성을 돌아본 일행은 웨일즈와 잉글랜드의 국경도시 체스터로 향한다. 콘위에서 체스터로 가는 길에 바닷가에 늘어선 엄청난 숫자의 현대판 풍차무리를 보았다. 영국의 대체에너지 개발 의지가 읽히는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