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물들’(감독 신아가, 이상철)속 캐릭터들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나 그 속을 뜯어보면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인물들로 채워졌다. 자신의 것이 없어 남의 것을 팔아먹고 사는 선우정(유다인)이나 모든 상황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속하길 바라는 형중(심희섭), 그리고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기회주의자인 진호(송재림)와 충동적으로 사는 소영(옥자연).
그 중에서도 송재림이 맡은 서진호는 영화의 제목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캐릭터다. 매 순간 진심을 다하지만, 그 진심은 상황이 바뀌면 또다시 다른 진심으로 변한다. 제 23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난 송재림은 서진호를 유명한 바람둥이의 일화에 비유했다. “어떤 사람이 바람둥이에게 ‘당신은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들을 어떻게 그렇게 많이 만날 수 있느냐’고 물었대요. 바람둥이는 ‘나는 그 순간만은 언제나 진심이었다’고 답해요. 진호는 그런 캐릭터 같아요. 어느 순간에나 최선을 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생각을 바꾸는 사람인 거죠.”
‘속물들’은 신아가와 이상철, 두 사람의 감독이 만든 영화다. 감독이 두 사람이니만큼 캐릭터에 대한 합의점을 찾아가는 과정도 꽤 길었다. 시나리오 발안자들과 배우 한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캐릭터를 연구하고, 수많은 상황과 생각을 내어놓았다. 송재림은 그 과정에 관해 “지난하지만 영화의 색을 결정짓는 과정”이라고 표현했다. 사람이 인생을 살며 딱 부러지게 끝나는 일이 없듯, 영화가 그리는 인물과 이야기들 또한 그렇기 때문이다.
“영화의 제목인 ‘속물들’ 자체가 시나리오 단계에서는 없었어요. 속물이라는 키워드를 받고 제가 진호를 연기했다면, 완성된 작품 속의 진호는 없었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처음부터 감독님들 두 분이 진호라는 캐릭터에 관해 완전한 답을 제시해주지 않으셨거든요. 보통은 감독님들이 어떤 가이드라인을 정해주신 후 피치를 올리느냐 내리느냐 정도에 관해 상의하는데, ‘속물들’은 달랐어요. 제가 ‘진호는 어떤 사람인가요?’라고 물으면 답을 내주시기보다는 오히려 더 많은 질문을 던져 주셨어요. 감독님이 씨앗을 심으시고 제가 나무를 키웠단 느낌이죠. 마지막 가지치기는 편집으로 완성됐고요.”
결과적으로 ‘속물들’은 송재림에게 꽤 많은 공부를 하게 만든 작품이었다. 큰 틀을 잡은 후 배우들에게 질문을 던져가며 길을 터 주는 종류의 작업은, 사실 상업 배우들에게는 꽤 하기 힘든 경험이다. 과정은 어렵고 뜬 구름 잡는 듯 했지만, 완성된 ‘속물들’은 가지런하면서도 입체적이기 그지없는 이야기가 됐다. 하지만 막상 송재림에게는 너무 어렵고 진저리쳐지는 경험은 아니었을까. 송재림은 “연기 자체가 원래 학대를 동반하는 변태적 재미”라고 말했다.
“모든 일이 힘들고 어렵겠지만, 연기는 더더욱 자기학대적인 부분이 있어요. 나라는 사람에 관해 계속 의심하게 만들잖아요. ‘내가 쓰는 말투와 표정, 분위기가 이 작품에 맞나?’ 하는 단순한 고민부터 시작해서 스스로의 불만족스러운 부분을 끊임없이 지적하게 되거든요. 작품의 스코어가 안 좋으면 더더욱 화살이 제게로 꽂히고요. 하지만 그런 걸 끊임없이 극복하고 싶어하는 재미 때문에 연기를 계속 하게 되는 것 같아요. 변태적이에요.(웃음)”
“재미를 넘어서 이제는 더 잘 하고 싶어요. 제 취미생활 중 하나가 모터사이클이거든요. 돈도 많이 들고 새벽에 굳이 나가서 먼 길을 달려야 하니 힘들지만, 도착하면 재미있을 테니까 매번 나가게 돼요. 연기도 마찬가지예요. 힘들고, 잠도 몇 시간 못 자고 시달릴 때가 많지만 몇 발자국만 더 가면 제가 기다리던 뭔가가 있을 것 같아요. 대본 하나를 줘도 배우마다 다른 캐릭터가 나오곤 하잖아요. 그런데 제가 해석한 캐릭터가 감독님과, 나아가 대중과 코드가 맞아서 호평 받았을 때는 ‘잭팟’이라도 터트린 기분이 돼요. 연기에 있어 정확한 기준은 없지만 그런 게 ‘잘 한다’는 거겠죠.”
송재림은 11월 JTBC ‘일단 뜨겁게 청소하라’ 방영을 앞두고 있다. 반 사전제작이라 아직은 여유가 있어 보이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많지 않다’고 웃었다. 정신적으로 계속해서 긴장하고 있다 보니 차라리 방영일이 빨리 다가왔으면 좋겠다는 초조함마저 엿보였다.
“감독님이 주시는 자유도가 높다 보니 긴장감이 더 커요. 지금은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촬영하지만, 사실 매일 촬영하는 게 정신적으로는 훨씬 나은 것 같기도 해요. 일주일에 이틀이라는 시간을 위해 나머지 5일도 감정적 긴장 상태를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거든요. 그래서라긴 뭐하지만 나사를 하나 빼고 살려고 해요. 카메라 앞에서나 밖에서나 경직돼 있기보다는 저 스스로의 나사를 풀고 있어 보려고요. 현실과의 타협점을 찾아가고 있달까요. 예전보다 욕심도 많이 버렸어요. 내 것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집착하지 않고, 나중에 대한 걱정도 놓아 두려고요. 그게 제가 연기자로서 사는 요령 같아요.”
부산=이은지 기자 onbge@kukinews.com